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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피성[수 20장 1-9]

조회 수 1380 추천 수 0 2015.07.24 19:24:25

도피성[201-9]

 

1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모세를 통하여 너희에게 말한 도피성들을 너희를 위해 정하여 3 부지중에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그리로 도망하게 하라. 이는 너희를 위해 피의 보복자를 피할 곳이니라. 4 이 성읍들 중의 하나에 도피하는 자는 그 성읍에 들어가는 문 어귀에 서서 그 성읍의 장로들의 귀에 자기의 사건을 말할 것이요, 그들은 그를 성읍에 받아들여 한 곳을 주어 자기들 중에 거주하게 하고 5 피의 보복자가 그의 뒤를 따라온다 할지라도 그들은 그 살인자를 그의 손에 내주지 말지니, 이는 본래 미워함이 없이 부지중에 그의 이웃을 죽였음이라. 6 그 살인자는 회중 앞에 서서 재판을 받기까지 또는 그 당시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 성읍에 거주하다가 그 후에 그 살인자는 그 성읍 곧 자기가 도망하여 나온 자기 성읍 자기 집으로 돌아갈지니라 하라 하시니라." 7 이에 그들이 납달리의 산지 갈릴리 게데스와 에브라임 산지의 세겜과 유다 산지의 기럇 아르바 곧 헤브론과 8 여리고 동쪽 요단 저쪽 르우벤 지파 중에서 평지 광야의 베셀과 갓 지파 중에서 길르앗 라못과 므낫세 지파 중에서 바산 골란을 구별하였으니 9 이는 곧 이스라엘 모든 자손과 그들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을 위하여 선정된 성읍들로서 누구든지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그리로 도망하여 그가 회중 앞에 설 때까지 피의 보복자의 손에 죽지 아니하게 하기 위함이라.

 

2차 세계대전이 19455월 독일의 패배로 사실상 끝났을 때 유대인들의 마음속에는 이제는 어찌하든지 자신들이 당한 억울한 피값을 찾아야 한다는 복수심에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당시 독일의 육군 중령으로서 유대인 학살을 담당하였던 아이히만 아돌프의 행방을 찾기 시작했는데 그 행방이 묘연했습니다. 그는 유대인을 아무런 까닭 없이 잡아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감금하고 끝내는 그들을 가스실에 집어넣어 강제로 학살한 사람입니다.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19:21) 갚을 수 있다는 율법의 가르침을 가진 유대인들은 땅 끝까지 찾아가서 아이히만을 자신들의 법정에 세우는 것이 그들의 의무이자 복수자의 사명으로 알았습니다. 그들은 결국 아르헨티나에 몰래 숨어있던 아이히만을 19605월 체포하고 1961년 재판에 회부하여 그 해 1215일 유죄 판결을 내려 19625월에 사형을 집행하였습니다.

 

1945년에 독일이 항복했으니까 거의 17년 간 땅 끝까지 원수를 찾아서 체포하였는데 이스라엘 백성들 중 하나가 남더라도 원수를 찾아내고야 마는 유대인들의 이 집념은 그들의 문자적 구약정신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을 수 있다는 율법의 계명을 통하여 인간의 생명의 존엄성을 확인시켜 주셨지만, 그 가운데 특별히 본의 아니게 부지중에 살인죄를 범한 자에게 복수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정신과 상반되므로 이러한 경우에는 또 다른 해결책을 주셨습니다. 즉 부지중에 고의성이 없이 살인죄를 범한 자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도피성 제도를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도피성 제도를 살피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도피성 제도는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해주신 사랑의 표현입니다.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이스라엘 각 지파에게 땅의 분배가 다 이루어졌습니다. 바로 앞 절인 1951절에 보면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의 지파의 족장들이 실로에 있는 회막 문 여호와 앞에서 제비 뽑아 나눈 기업이 이러하니라. 이에 땅 나누는 일을 마쳤더라"고 하십니다.

 

19장까지는 가나안 정복 및 기업 분배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으며,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 대업을 무사히 끝마친 여호수아에게 새로운 지시를 주시고 있는데 그것은 곧 기업의 땅 중에서 도피성을 선정하라는 것입니다.

 

20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주체가 누구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이 도피성 명령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복 이전에 명령하신 것입니다. 갑자기 '도피성이 필요하겠다' 그래서 만든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 땅 정복 훨씬 이전에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정복을 시작하기 직전 모압 평지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 도피성 택정에 대하여 이미 말씀해 주셨습니다(21:12; 35:9~34; 19:1~13). 그리고 가나안 땅을 무사히 정복한 이후에 여호수아에게 다시금 당부를 하시고 있습니다.

, 이 도피성은 여호수아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도 아니었고, 모세의 지시를 따른 것도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제도였던 것입니다.

 

그 도피성의 목적은 "부지중에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에게 "피할 곳"을 제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부지중"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고의성이 없는, 우연한, 실수의'라는 뜻이며 '순간적 격분에 의한 충동 때문에'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구체적인 살해 동기나, 사전에 의도된 계획 같은 것이 전혀 없이 실수나 우연한 사고로 사람을 죽이게 된 경우를 위한 것으로서, 오늘날로 치자면 바로 '과실치사(過失致死)'에 해당되었습니다.

 

3절 이하에 여러 차례 "피의 보복자"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 "보복자"란 바로 '고엘'이라는 유명한 히브리어 단어입니다. 원래 이 단어는 '도로 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서 주로 '대신 갚아 주는 사람' 혹은 '기업 무를 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원수를 갚아 주려는 자'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즉 죽임을 당한 쪽의 가족이나 친척 중에 복수심에 불타서 그 살인자를 잡아 죽이려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부지중 사람을 실수로 죽인' 것은 합법적인 재판을 받는다면 결코 사형을 당할 만한 죄는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원한이라는 감정이 있어서, 비록 실수로 일어난 사고인 줄은 안다 할지라도 자기의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족을 죽인 사람이라면 역시 어찌하든지 죽여서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마련입니다.

 

도피성은 바로 그런 '인간적인 복수심' 때문에 어떤 억울하고 부당한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세워진 제도였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오늘날 같으면 그처럼 '과실치사'의 경우에도 정당하게 재판을 받고, 개인적인 복수는 당하지 않도록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지만 옛날 사회에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즉 이 도피성 제도는 과실치사를 저지른 사람을 안전하게 보호해 주기 위한 것으로서 당시 주변 이방 민족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아주 특별한 제도였습니다. 즉 다른 나라의 것을 모방한 것도 아니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구해서 시작한 것도 아니었고, 모세나 여호수아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필요한 줄을 아시고 마련해 주신 것이 바로 '도피성'이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죄 사함'이라는 것은 그 개념의 발상부터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죽인 살인자라면 비록 그것이 '과실치사'라 하더라도 어떤 식으로든지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간 사회의 상식과 법과는 달리 '분명히 죄를 지은 사람이지만 그 죄값도 받지 않고 그냥 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이것은 인과응보라는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에게는 아주 생소한, 전혀 뜻밖의 개념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인애와 자비가 한량없으신' 하나님만이 그런 '죄 사함'이라는 실로 놀라운 은혜를 우리 죄인에게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가장 큰 일 두 가지를 말할 때에 하나는 '창조사역'이며, 또 하나가 바로 '구원사역'인 것입니다. '죄인에 대한 용서와 구원'은 사람이 스스로 필요하다고 인식해서 하나님께 요청을 올림으로써 시작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위대한 성자가 득도를 함으로써 비롯된 것도 아니었고, 무슨 교주가 착상해 낸 기발한 아이디어도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오직 하나님께서 오직 당신의 인자하심을 따라 죄인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인 것입니다. 인간의 ''이나 '공의'만을 따진다면 결코 성립될 수 없는, 아니 애당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이 '죄 사함'은 오직 하나님께서 죄인을 위해 친히 베풀어 주신 '놀랍고도 위대한 은혜'임을 다시 한번 깨닫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3절을 같이 읽습니다. "부지중에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그리로 도망하게 하라. 이는 너희를 위해 피의 보복자를 피할 곳이니라."

 

구약 성경에 보면 히브어로는 '아리 미클라트'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영어로는 'city of refuge'라고 하며 우리 성경에는 '도피성'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아리 미클라트는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끌어드리는 성읍'이라는 뜻입니다.

 

3512절에는 "이는 너희가 복수할 자에게서 도피하는 성을 삼아 살인자가 회중 앞에 서서 판결을 받기까지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도피성의 목적은 고의적인 살인의사 없이 우발적으로 살인한 자가 보복자로부터 보복을 피할 수 있도록 하는데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보호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도피처를 주시고 안식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신 하나님의 뜻은 얼마나 고맙고 놀라운 은혜입니까? 이것은 관대히 용서하여 주시는 자비와 때를 따라 도우시는 은혜와 늘 보호하여 주시는 공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회개하며 나아갈 때 살인범보다도 더한 죄일지라도 사랑으로 덮어 주시는 하나님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자비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부지중 사람을 죽인 자가 나와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을 통해 사람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 후, 땅 나누는 일을 마쳤는데 하나님께서는 20장에서 살인이 있을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미리 도피성 제도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과신하면 안 됩니다. 누구나 부지중에 오살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예수 믿는 사람이 그럴 수 있어!' 이런 말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어쩌다 가끔 쓸 수도 있겠지만 '절대로, 반드시, 언제나, 매일, 결코, 항상, ' 이런 단어를 자주 쓰는 사람은 완벽주의자 성향을 가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완벽주의가 가지는 특징은 스스로 너무 높은 기준을 정해놓고, 한 번 어기면 그것으로 자책하면서 지금까지 이루어놓은 것을 다 물거품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완벽주의 부모 밑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형벌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고, 자존감이 낮고 의욕상실에 빠져서 자포자기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인색하니까 타인에 대해서도 인색하고 날마다 비판이 많습니다. 또 엄격한 까닭에 쓸모없는 일에 과잉 헌신을 하고, 너무나 스케줄에 집착하다가 본질을 놓치는 것입니다.

 

내가 던지는 말이 살인을 하는 줄도 모르고 생각없이 던지는 말 중에서 상처 주는 말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떤 가정에서 남편이 반찬투정을 하니까 부인이 '쥐꼬리만큼 벌어다주면서 뭘 바라는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 때문에 남편이 일주일 동안 가슴앓이를 하고, 그게 신혼 때 있었던 일인데 20년 동안 담고 있어도 상처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때 부인이 부지중 살인을 한 것입니다. 칼로 살인을 해야 살인이 아닙니다.

 

민수기 3513~15절을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13 너희가 줄 성읍 중에 여섯을 도피성이 되게 하되 14 세 성읍은 요단 이쪽에 두고 세 성읍은 가나안 땅에 두어 도피성이 되게 하라. 15 이 여섯 성읍은 이스라엘 자손과 타국인과 이스라엘 중에 거류하는 자의 도피성이 되리니 부지중에 살인한 모든 자가 그리로 도피할 수 있으리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너기 전부터 도피성의 필요를 이미 아셨으며 그래서 부지중에 살인한 자를 위해 피할 길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오늘날 이 시대의 우리에게도 피할 길을 역시 열어주십니다. 그렇다면 진정 나의 도피성이요, 피할 길이 되는 곳은 진정 어디입니까? 바로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우리 구주 그리스도이십니다.

 

둘째, 도피성은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7절과 8절을 보면 요단강 서편의 가나안에 지정된 세 도피성 갈릴리 게데스(납달리) 세겜(에브라임) 기럇 아르바 곧 헤브론(유다)과 요단강 동편에 지정된 세 도피성 베셀(르우벤) 길르앗 라못() 바산 골란(므낫세), 모두 여섯 개의 도피성을 지정해 주셨습니다.

 

메튜 헨리는 여섯 도피성들의 이름이 지니는 뜻을 그리스도와 연관시켜 해석하였습니다. 거룩한 곳을 뜻하는 게데스는 성전 되신 그리스도를(2:19), 어깨를 뜻하는 세겜은 정사를 어깨에 메시고 우리를 다스리시는 그리스도를(9:6), 교제를 뜻하는 헤브론은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고후 5:18,19), 성채를 뜻하는 베셀은 성도들이 피할 성채 되시는 그리스도를(91:2), 높은 곳을 뜻하는 길르앗 라못은 성도들로 하여금 높은 하늘에 앉게 하시는 그리스도를(2:6), 기쁨을 뜻하는 골란은 성도들에게 기쁨을 주시는 그리스도를(15:11) 각각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영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 도피성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도피성은 어떤 곳에 세웠습니까? 도피성은 요단강을 중심으로 보면 동편에 셋, 서편에 셋으로 분포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하므로 가장 먼 곳에서도 쉬지 않고 하루 만에 이 도피성까지 도달할 수 있게 했습니다.

 

193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 전체를 세 구역으로 나누어 길을 닦고 모든 살인자를 그 성읍으로 도피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도로인데 "도로를 닦으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전승에 의하면 이 도로는 넓이가 14m였다고 합니다. 14m이면 4차선 고속도로보다 더 넓은 도로입니다. 이 정도의 도로라면 로마시대의 어떤 도로보다 더 훌륭한 것입니다.

 

이것은 죄인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과 배려가 얼마나 크고 넓은가를 보여주고 있습

니다. 이곳으로 피해오는 오살자는 대개가 단체가 아니요, 개인입니다. 한 사람의 개인을 위해서 이렇게 넓은 도로를 만들게 하셨다는 것 이 사실을 접하고도 감동이 없다면 그것은 비정상일 것입니다. 그런데 문자적으로는 오살자 한 사람을 위한 이런 넓은 도로이지만 그러나 예표적인 의미로는 온 인류를 그리스도에게로 초청하시는 그리스도의 넓은 마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왕이 된 자들은 일년에 유대력으로 아달월 그러니까 12월에 반드시 1차씩은 이 도로를 정비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만약 무너져 패였거나 장애물이 있으면 반드시 정비해야만 합니다. 그러니까 항상 일등 도로를 유지시키는 것입니다. 이 도로는 왕의 직속 관할입니다. 그러므로 이 도로를 파괴하거나 딴 목적으로 변동시킬 수 없습니다. 이렇게 도로를 잘 정비한 이유는 피의 보복자가 추격할 때 오살자가 도피성의 먼저 도착하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 배려입니다. 거기다 '미클라트'라 하여 도피성이라는 방향 표지판을 설치하게 했습니다.

 

화살표를 넣어 미클라트! 미클라트! 미클라트! 그래서 누구든지 이 표지판만 보고도 도피성을 쉽게 찾아 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2절에 "너희를 위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도피성이 우리를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참 도피성 되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은 어려운 철학이 아니라, 지구상의 어느 종족 어느 인종이든지 구별하거나 차별하지 않고 누구든지 쉽게 찾을 수가 있으며, 누구든지 찾으려고 결심만 하면 쉽게 만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3:16, 17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본문 4-6절 말씀은 도피성을 사용하는 절차와 방법에 대한 내용입니다.

"성읍 문어귀"는 당시 사회에서 재판도 집행되던 장소였습니다. 도피성으로 도망친 사람은 바로 거기서 "그 성읍의 장로들의 귀에 자기의 사건을 말할 것이요"라고, 즉 모든 자초지종을 사실대로 진술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본인이 '부지중 오살한 것'이라고 즉 과실치사였다고 주장하면 그 '즉결재판'에서는 일단 그를 무조건 도피성에 받아 주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피의 보복자가 그 뒤를 따라온다 할지라도" 그 사람을 절대로 그들의 손에 "내어주지 말지니"라고 한 대로, 피가 피를 부르며 복수가 또 다른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 악순환을 철저히 방지하도록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후에 "회중 앞에서 재판을 받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정말 고의로 살인한 자인지 아닌지를 가려내기 위한 정식 재판이었습니다. 물론 그때라도 그 사람이 고의로 살인한 것이 밝혀지면 더 이상 도피성에 거주하지 못하고 쫓겨나서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정말 실수로 사람 죽인 것이 재판에서 드러나면 그는 도피성에서 안전하게 거주할 수 있는 영주권이 정식으로 주어졌습니다.

이렇게 도피성은 누구나 쉽게 찾아올 수 있게 하였고, 안전한 곳이었습니다.

 

셋째, 도피성은 어떤 사람이 들어가는 곳입니까?

 

냉엄하리만치 율법이 철저하게 적용되던 여호수아 당시의 상황에서 '도피성' 제도는 하나의 파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곳 도피성이 살인자가 피할 수 있는 성이라 하여 아무 살인자가 모두 피할 수 있는 곳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피할 수 있는 자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요?

 

첫째로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한 자만이 피하는 곳입니다. 도피성에 들어갈 수 있는 자는 부자나 학식이 있는 자가 아닙니다. 더욱이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자는 도피성의 문을 두드릴 수 없습니다. 오직 사람을 죽인 살인자 즉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인식하는 자이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도 우리들의 도피성이 되신 예수님께 피하는 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스스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인식하는 자이어야 합니다. 정녕 스스로를 의롭다 칭하는 교만한 사람은 결코 도피성을 필요로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피성에 피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스스로가 죄인이라는 인식이 기독교의 시작이자, 도피성 되신 예수님께 나아가는 첫 걸음입니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구원하려 오셨기 때문입니다(9:13).

 

둘째로 절박한 심정으로 나아가는 자만이 피하는 곳이 도피성입니다. 도피성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이곳 아니면 자신의 생명을 보존할 곳이 도저히 없다는 절박한 심령을 가져야 합니다. 그는 부지중이긴 하지만 사람을 죽였습니다. 때문에 보복자가 그 생명을 빼앗으려고 쫓아오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도피성이 자신의 생명의 유일한 안식처라 확신하고 그 입구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전력질주 할 것입니다. 그 행동 여하에 따라 생명의 보존여부가 달려 있다는 절박한 인식 때문입니다. 만약 그가 도피성이 아니라도 자신의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곳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도피성에 관한 확신이 희미하다면 도피성으로 피하는 일을 포기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의 도피성이 되신 예수님께 절박한 심정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오직 그분만이 나의 생명을 책임져 주실 것이라는 확신 가운데 완전하게 그에게 안기기까지 전력 질주해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의 대적 원수 마귀는 쉴 사이 없이 우리를 공격하며 미혹하며 쫓아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자기 죄를 고백하는 자만이 피하는 곳이 도피성입니다. 도피성에 도착하면 도피성 입구에 있는 장로들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합니다(20:4). 스스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느꼈고, 때문에 도피성 정문까지 쉬지 않고 달려 왔다 하더라도 자기의 죄를 장로들에게 고백하지 않는다면 결코 쉴만한 장소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도피성의 은총을 입는 마지막 단계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 자기 죄를 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6절에 보면 그처럼 합법적으로 도피성에 거할 수 있는 기간을 두고 "그 당시 대제사장이 죽기까지"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도피성으로 피해 왔을 때 그를 맞아 들여 주었던 현직 대제사장이 죽은 후에는 그 도피자가 이제 도피성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도 된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그때에는 그가 옛날에 저질렀던 '부지중의 살인'에 대하여 그 어느 누구도 그에게 복수할 수 없도록 법적으로 보호되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도피자에게는 이제 '완전하고도 영구적인 사면'이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이것은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성취하실 '대속 사역'의 그림자요, 예표입니다. 즉 참된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대신 희생 제물로 바쳐서 죄인들의 모든 죄를 '대신 갚아 주심'으로써 우리가 '완전하고도 영구적인 죄 사함'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바로 이 '도피성의 대제사장'이 뚜렷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죄는 분명히 일반 이스라엘 백성이 저질렀지만, 그 죄의 완전 사면은 그 죄와는 직접적으로 아무 상관없는 대제사장의 죽음과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살인죄를 저지른 본인은 자신의 '죄 사함'에 대하여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않았으며 또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전히 제3자인 대제사장에 의하여 그처럼 완전한 사면을 얻고 자기 고향에 돌아가서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니 그로서는 그보다 더 감사하고 감격할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의 '죄 사함'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때문에 주어졌습니다. 정작 죄인인 우리 쪽에서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무슨 '고행'을 통하여 이제 죄 용서 받을 만큼 충분한 '죄값'을 스스로 치렀기 때문에 용서받게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선행'의 공로들을 많이 쌓아서 이제 '나의 죄를 사해 주십시오'라고 하나님께 당당하게 요구할 만한 입장이 되었기 때문에 죄 사함을 얻게 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100퍼센트 순전히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공로' 덕분일 뿐입니다. 우리가 받아 누리게 된 '죄 사함'은 그야말로 '공짜로 받게 된 정말 고마운 선물'인 것입니다. 하지만 공짜로 받은 것이라고 해서 뭔가 불확실하거나 모자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일단 이 '죄 사함'을 받고 나면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우리를 죄인이라고 정죄할 수 없으며, 세상의 그 어떤 법도 우리에게 '사망의 선고'를 내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대제사장의 죽으심을 통하여 '칭의'를 입게 된 사람은 그야말로 '죄로부터 완전하고도 영원한 자유'를 누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도피성의 제도'는 만약 그 살인자가 대제사장이 죽기 이전에 마음대로 도피성을 떠나면 그런 '사면의 혜택'을 누릴 수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즉 그를 쫓던 '보복자'가 그 살인자를 죽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저버리고 그 구원의 언약 밖으로 나가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마땅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 죄인을 무조건적으로, 그러면서도 완전하게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베풀어 주신 이 대제사장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제사'를 평생토록 늘 감사드리면서 바로 그 '대속의 공로'에 힘입어 영원한 구원에까지 이르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도피성'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가나안은 그저 '땅 분배'만 한다고 절로 축복의 땅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도피성'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주는 물질적 풍요보다도 더 중요한 축복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 생활에 진정한 축복을 넘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죄 사함'을 베풀어 주는 '도피성'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오직 하나님께서만 미리 아시고 그처럼 예비해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축복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가나안'이 그랬다면 오늘날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살기 좋아 보여도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이 저주의 선고로 인하여 모든 사람은 다 여전히 죽음이라는 공포에 사로잡혀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 사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똑같이 적용되는 엄연하고도 냉정한 현실입니다.

 

감사한 것은 바로 우리는 놀라운 축복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죽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는 시대 말입니다. 이미 대제사장되신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죽음으로 완전한 구원을 이루어 놓으셨기에 누구든지 믿고 회개만 하면 됩니다. 구원입니다. 해방입니다. 은혜입니다. 자유입니다. 축복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지성소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히 죄가 사함을 받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지정해 주신 '구원의 도피성'에만 이 무서운 저주, 이 두려운 사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진정한 평안과 자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영원하고도 참되신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거저 선물로 주시는 '죄 사함'의 은총입니다. 결코 세상이 주지 못하는 이 놀라운 '도피성', 우리의 인생을 죽음의 공포로부터 완전히 해방되게 해 주는 이 고마운 '도피성'을 바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찾고 그 구원의 은혜 안에 영원히 거주하는 축복을 꼭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고통과 시험과 두려움을 당할 때에 오직 '여호와께 피하는' 자에게만 진정한 '도피성'의 문이 열리게 됩니다. 바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고 약속하신 예수님의 품만이 죄인에게 있어서 진짜 피난처요, 영원한 안식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짐이 괴로울 때, 죽음의 고통이 나를 짓누를 때일수록 죄인의 '도피성'이 되어 주시는 이 주님께로 즉시 달려가 그 넓은 품에 더욱 깊이 안김으로써 금세에서도 참된 평안을 누리고 내세에서 영원한 구원까지 얻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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