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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비밀, 그리스도[골 2장 1-10]

조회 수 641 추천 수 0 2015.07.24 19:33:25

하나님의 비밀, 그리스도[21-10]

 

1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얼마나 힘쓰는지를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2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4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교묘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5 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가 질서 있게 행함과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이 굳건한 것을 기쁘게 봄이라. 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10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본문 3절에는 "지혜""지식"이라는 두 단어가 함께 등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새번역, "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지혜와 지식은 각각 헬라어 소피아(sophia)그노시스(gnosis)를 번역한 말입니다. 지식이 어떤 특수한 사실에 대한 명료한 인식을 강조한 것이라면, 지혜는 지식보다 좀더 넓은 개념으로서 지식을 바르게 사용할 줄 아는 적용 능력 또는 판단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이 두 단어를 언급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골로새 교회의 정황에 비추어 볼 때 그 교회는 지식이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지혜가 있는 사람을 필요로 하고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 당시에 골로새 교회를 위협하던 이단사조가 있었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여러 차례 언급했습니다. 이들 영지주의자들은 말 그대로 영적 지식이 신앙생활의 전부인 양 지식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대, 오늘날 교회에 필요한 사람은 지식뿐 아니라 지혜를 갖춘 사람입니다. 물론 바울이 지식의 중요성을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자칫 간과하기 쉬운 지혜의 중요성을 지식과 더불어 강조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우리가 참으로 구해야 할 참된 지혜, 참된 지식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혜요, 지식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혜가 어떤 것인지 세 가지 대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사랑하게 하는 지혜입니다.

 

바울 사도는 아마도 골로새 교회를 직접 방문한 적이 한 번도 없었을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골로새 교회는 바울의 제자였던 에바브라라는 사람이 세운 교회였습니다. 바울은 비록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주님 안에서 한 형제 된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애정을 담아 인사하면서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는 지혜와 지식에 대해 2장 초반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지혜와 지식의 초점은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가리켜 2절에 보면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말합니다. 이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알고 깨닫는 것이 가장 위대한 지혜를 소유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깨닫기 위해 먼저 해야 할 일로서 바울이 강조하는 것이 바로 "사랑 안에서 연합하는" 일입니다.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2).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여러분 모두가 사랑으로 결속되어마음에 격려를 받고, 깨달음에서 생기는 충만한 확신의 모든 풍요에 이르고,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온전히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새번역)."

 

그렇다면 바울이 그리스도를 깨닫는 것에 앞서 사랑의 연합을 먼저 강조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복음은 사랑의 메시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고서는 복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깨달아 알 수 없습니다.

 

알기 쉽게, 전도를 예로 들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전도는 곧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려는 사람이 전도 대상자인 상대방을 사랑할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 메시지가 얼마나 영향력 있게 전달될 수 있겠습니까? 복음의 메시지는 사랑의 메시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관계가 형성되지 않고서는 이 메시지가 제대로 이해될 수 없고, 더군다나 이런 상태에서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깨닫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어느 도시에 "요한복음 316절 부인"이라는 별명을 가진 자선 사업을 하는 예수님을 믿는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 도시에 고아원이 있었는데 열세 살쯤 되는 어린 소년이 독립해서 살아보려는 마음으로 무작정 고아원을 나와 추운 겨울 거리에서 신문을 팔기 시작했습니다.

신문은 잘 안 팔리고 배는 고프고 날씨는 못 견디게 추웠습니다. 더 이상 참지 못할 것 같아지자 어느 날 순찰 중이던 경찰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어린 소년의 처지를 딱하게 생각한 경찰은 이 아이를 어떻게 도울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손뼉을 탁 쳤습니다. "얘야, 걱정할 것 없단다. 요한복음 316절 부인 집에 가 보렴. 여기서 멀지 않단다. 이 길을 죽 따라 내려가다가 왼쪽 골목이 나오거든 그리로 들어가렴. 그 골목의 세 번째 집이 요한복음 316절 부인 집이란다. 누구냐고 묻거든 아무 소리 하지 말고 "요한복음 316!"이라고 하면 너를 아주 반갑게 맞아줄 게다."

 

소년은 영문도 모른 채 경찰이 일러준 대로 해보았습니다. 골목에 들어서서 세 번째 집의 초인종을 누르자 "누구세요?"하며 묻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래서 좀 엉뚱하다 싶긴 했지만 경찰이 가르쳐 준 대로 용기를 내어, "요한복음 316!"하고 암호를 대듯 조용히 입을 열었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문이 스르르 열렸습니다. 대문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며 소년은 생각했습니다. '요한복음 316절이 뭔지는 몰라도 문을 열어 주는 것과 관계가 있는 말 같군.'

 

집안으로 들어서자 부인이 소년을 아주 반갑게 맞아 주면서 "추웠겠구나, 벽난로에서 몸을 좀 녹이고 있으렴" 하며 부엌으로 들어갔습니다.

소년은 추위에 얼어붙은 손과 발을 녹이며 또 생각했습니다. '요한복음 316절이 뭔지 모르지만, 추운 사람을 따뜻하게 하는 것과 관계가 있을 거야.'

 

잠시 후 부인이 내놓는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소년은 또 마음속으로 '요한복음 316절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이건 나같이 배고픈 사람을 배부르게 하는 것과 관계있는 말일 거야'하고 생각했습니다.

 

식사가 끝나고 나니 이번에는 또 "2층에 목욕할 물이 준비되어 있으니 개운하게 목욕을 좀 할래?" 하고 권했습니다. 소년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묵은 때를 씻어 내면서 또 생각했습니다. '요한복음 316절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이것은 나같이 지저분한 사람을 깨끗하게 하는 것과 관계있는 말일 거야.'

 

기분 좋게 목욕을 마치자 부인이 다시 말했습니다. "피곤할 텐데, 이 방에서 푹 자렴." 새하얀 침대보와 두툼한 이불이 말끔히 놓여 있는 침대에 누우면서 소년은 잠들기 전에 마음속으로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요한복음 316절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이것은 나같이 피곤한 사람에게 안식을 주는 것과 관계가 있을 거야.'

 

얼마나 잘 잤는지 모릅니다. 아침이 되었습니다. "잘 잤니?"라는 말과 함께 아침 식사가 준비되었으니 어서 나와서 식사하라는 부인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식탁에 앉자 부인이 기다렸다는 듯이 소년에게 묻습니다. "얘야, 너 요한복음 316절이 뭔지 알겠니?" 소년이 대답했습니다. 글쎄요, 잘은 모르겠지만 요한복음 316절은 닫힌 문을 열어 주고, 추운 사람을 따뜻하게 해주며, 배고픈 사람을 배부르게 하고, 피곤한 사람에게 안식을 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그런데 그것 말고도 한 가지가 더 있지. 요한복음 316절은 죄를 범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며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 수 있도록 영원한 생명을 준단다." 그러면서 부인이 성경을 펴서 요한복음 316절을 소년에게 읽어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자선 사업가 부인을 통해 이미 깊은 사랑을 경험한 이 소년에게는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다는 말씀이 전혀 낯설지 않은 생생한 진리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사랑이 바탕에 깔려 있지 않은 지식은 때때로 매우 부정적인 힘을 분출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죄를 짓는 이유가 다 제대로 배우지 못한 탓이라고 믿는 간수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지식에 대한 그의 신념은 참으로 굳건했습니다. 어느 날, 한 젊은이가 새로이 수감되었습니다. 그는 글을 쓸 줄도 읽을 줄도 모르는 문맹이었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고 배워야 산다는 신념에 따라, 간수는 이 젊은이를 설득하여 짬짬이 글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이 젊은이의 출감 날이 되었습니다. 출감을 축하하며 기쁘게 떠나보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다시 교도소에 들어왔습니다. 이번에는 죄명이 무엇인가 했더니 문서 위조죄였습니다.

 

사랑을 배우지 못한 채 쌓인 지식은 때때로 파괴적인 힘을 발산합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가 필요로 하는 진정한 지혜와 지식은 사랑을 낳는 지혜와 지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게 만드는 지혜입니다. 사랑하게 하는 지혜. 사랑하게 하는 지식을 구하는 우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혜는 믿음을 세우는 지혜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지혜나 지식이 우리 믿음을 세워 주고 이웃의 믿음을 세워 줄 수 있다면 이런 지혜나 지식이 얼마나 요긴하겠습니까? 영지주의라는 이단도 신앙의 체계 안에서 발생한 기독교의 분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이들은 그들의 모임 안에 하나님을 깨달아 알 수 있는 놀라운 영적 지식이 있다며 사람들을 유혹했습니다.

그들은 소위 "하나님을 아는 단계"라 신앙을 복잡한 것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견고한 신앙을 갖기 위해 영지주의의 문을 두드린 사람들은 오히려 신비적 의식에 몰입하면서 결국 신앙이 모호해졌습니다.

 

참된 신앙은 단순한 것인데, 이단은 단순한 신앙을 복잡하게 만드는 특징이 있습니다. 복음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라면 그것이 어떻게 복음(복된 소식)이 될 수 있겠습니까? 복음은 초등학교 문턱에도 가 본 바 없는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어린아이도 이해할 수 있는 단순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지식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갖기 위해서 요구되는 지식은 그렇게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아주 단순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단은 이 단순한 신앙을 복잡하게 만들어 사람들을 혼란케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4절에서 이렇게 경고합니다.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교묘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이단은 속이는 것입니다.

신앙을 혼미하게 하는 이단이 기승을 부리는 상황에서도 일부 골로새 성도들은 믿음 위에 굳게 서 있음으로써 바울에게서 칭찬의 소리를 듣습니다.

"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가 질서 있게 행함과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이 굳건한 것을 기쁘게 봄이라"(5).

 

그러면서 바울은 계속해서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설 것"(7)을 강조합니다. 믿음에 굳게 서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앙적 지식이 자신의 믿음과 이웃의 믿음을 굳게 세우는 데 도움을 준다면 그 지식은 복음입니다. 그러나 신앙을 오히려 복잡하게 만들고 모호하게 만드는 신앙적 지식은 참된 복음이 아닙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단순한 사실에 근거한 것입니다. 단순한 복음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복음이 단순한 것이듯 그 복음을 전하는 전도도 단순하게 할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던 분의 이야기입니다. 그 선교사가 일하던 지역에 문맹에다가 시각 장애까지 안고 있는 원주민 할머니가 한 분 있었는데 그 할머니가 그렇게도 전도를 잘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분의 전도방법이 아주 독특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이 할머니가 선교사님을 찾아왔다고 합니다. 그러더니 대뜸 이렇게 묻습니다. "선교사님, 그 좋은 요한복음 316절 말씀이 성경 어디에 있습니까? 그래서 선교사님이 성경을 찾아 펴 주었습니다.

그러나 글을 읽을 수 없는 이 할머니는 요한복음 316절에 빨간 줄을 그어 달라고 선교사님에게 부탁합니다.

 

그때부터 그 할머니의 전도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할머니는 날마다 학생들 하교시간에 맞춰 동네 근처에 있는 학교들을 찾아가 정문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학생에게 "학생, 나 좀 도와줘" 하며 말을 건넵니다.

시각 장애가 있는 할머니가 도와달라고 하니 아이들이 "뭘 도와드릴까요?" 하며 다가옵니다. 그러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 이 할미가 좋아하는 책이 있는데 내가 눈이 안 보여서 그러니 여기 빨간 줄 쳐 놓은 부분만 좀 읽어줘?" 그러면 학생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하고 읽어 줍니다.

 

"그래, 학생은 방금 읽은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어?"하고 묻습니다. 모르겠는데요."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말이야. 나도 사랑하고 학생도 사랑하고. 그래서 우리에게 그분의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인 예수님을 주셨다는 거야. 그 예수님을 믿으면 죄가 다 용서함 받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영생을 얻게 된다 이 말이야." 이런 식으로 할머니의 전도는 계속되었고 그리하여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할머니를 통해 예수님을 알게 된 사람 중에 그 나라의 기독교 지도자로 성장한 사람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단순한 복음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믿음을 세워 주는 역할을 해 왔는지 모릅니다. 우리 시대가 필요로 하는 지혜와 지식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내 믿음을 굳게 하고 이웃들의 믿음을 세워 줄 수 있는 그런 지혜와 지식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삶을 견고하게 하는 지혜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기독교 신앙은 반 지성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 역시 지식에서 출발하고 지식을 귀히 여기지만 그렇다고 지식에만 의존하지는 않습니다. 제대로 알지 못하면 믿을 수가 없습니다. 복음이 무엇인지, 예수님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머리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여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영접할 때는 머리 속이 아니라 마음에 영접해야 합니다. 깨닫는 것은 머리로 하지만 그리스도를 모셔 들일 때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머리는 차갑고 가슴은 뜨거운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주로 모신 사람은 온몸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지식은 신앙이 되어야 되고 신앙은 다시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6절에서 강조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손님이 아니라 주인으로 받아들인 자들입니다. 그분이 삶의 주인이시라는 말은 곧 삶의 모든 영역을 그분께서 다스리신다는 말입니다. 바울의 말처럼, 그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였다면 이제는 그분 안에서 행해야 합니다. 행하되, 날마다 행하며 계속해서 행해야 합니다.

 

바울은 학식이 매우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빌 37-8절에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성경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자기 생애 속에서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3:10, 새번역)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생활은 주님과 호흡을 같이 하며 주님과 함께 승리하면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입니다! '그분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곳저곳으로 다니며 새로운 스릴을 찾아 방황치 말고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굳게 서서"(7) 이미 받은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새로운 사상이나 별다른 가르침을 찾지 말고 '교훈을 받은 대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분의 다스림을 받는 자의 삶의 모습을 바울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7).

뿌리 깊은 나무, 땅 속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 사시사철 수분과 영양분을 공급받으며, 시절을 따라 탐스러운 열매를 맺고, 가뭄 때에도 가뭄을 모르는 청청한 나무를 마음속에 그려 보십시오.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신 자들은 이 뿌리 깊은 나무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또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자들은 "세움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의 삶은 뿌리 깊은 나무와도 같고 견고한 건물과도 같습니다. 진정한 지혜, 참된 영적 지식은 이같이 삶을 세워 주며 견고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 견고한 삶은 플러스의 삶입니다.

 

독일의 복음 전도자인 라인하르트 본케 목사님이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모든 인생은 마이너스에서 시작한다." 마이너스란 모자람, 빼앗김, 상실 등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처음부터 행복한 인생은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소유의 많고 적음에 대한 문제가 아닙니다. 환경의 부유함과 척박함에 대한 것도 아닙니다. 마음에 대한 문제입니다. 많은 것을 가졌음에도 허전하고 많은 성취를 이루었음에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 이것이 마이너스 인생의 현주소입니다.

 

몇 년 전에 홍콩의 유명한 배우였던 장국영이 자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날이 41일이라, 처음에는 만우절 농담인줄 알고 많은 사람들이 믿지 않았습니다만, 그는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사업을 하는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영국에 유학까지 다녀온 엘리트였습니다. 잘 생긴 얼굴에, 14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 사람이 자살이라는 최악의 수순을 밟았을까요?

 

그가 영화 중에 읊조렸다는 시 한 편이 그의 인생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발 없는 새가 있다는데/

그 새는 항상 날아다니기만 하다가/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쉰다고 하네./

새가 일생에 딱 한번 땅에 내려앉을 때가 있다네./

그때는 죽을 때라네."

 

여러분, 발 없는 새를 상상해 본 적이 있습니까? 발이 없기에 땅에 내려 쉴 수가 없고, 그렇기에 평생을 쉬지 않고 날갯짓만하다가, 땅에 내려오는 그날 세상을 떠나야 하는 비통한 새의 운명, 이것이 장국영의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너무 비관적이고 허무한 인생관이 아닙니까? 그러나 이렇게 살다가 인생 무대를 떠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열심히 날갯짓을 하며 쉬지 않고 다니지만 정작 누려야 할 마음의 기쁨을 상실한 인생이 많습니다. 많은 것을 가졌지만 마음의 쉼터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인생이 많습니다. 이것이 마이너스 인생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갈수록 힘들고, 살수록 허무해지는 인생은 아닌지요?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본래 인간에게 주신 것은 풍성하고 생명이 넘치는 플러스의 삶이었습니다. 넘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축복의 열매가 담을 넘고 지경을 넘어 온 땅을 부요하게 하는 삶이었습니다. 1010절에 보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대표적인 예가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복의 근원으로, 통로로 부름 받았고 땅의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누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이름 자체가 '더하기'였습니다만, 그는 샘 곁의 무성한 가지가 되어 그 가지가 담을 넘었다고 했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그 안에서 삶을 설계했기에 넘치는 플러스 인생을 산 것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여기서 "헛된 속임수"라는 말과 "사로잡는다"는 말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헛된 속임수"란 겉모양은 그럴 듯해 보이지만 사실은 속이 텅텅 비어 있는 가짜를 말합니다. 그랬기에 월리암 바클레이는 이것을 '공허한 신기루'라고 번역했습니다.

 

이것이 세상 철학의 본질입니다. 화려하고 좋아 보이지만 따라가 보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세상적 성공 철학이 외치는 소리가 이런 것들 아닙니까? '학벌이 최고야, 그것만 가지면 성공이 기다리고 있어! 권력이 최고야, 돈이면 다 되, 거짓말 좀 하면 어때? 남의 것 베껴서 표절 좀 하면 어때? 일단 따고 보는 거야!" 이런 허황된 삶의 철학이 우리 인생을 어떻게 한다는 것입니까? "사로잡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상실을 향해 가는 마이너스의 길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열어 준 길은 플러스를 향해 가는 길입니다. 그리스도보다 새로운 것이 없고, 그리스도보다 깊은 것이 없으며, 그리스도보다 높은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한다"(9)는 것입니다. 이것을 새번역은 "그리스도 안에 온갖 충만한 신성이 몸이 되어 머물고 계십니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것이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를 붙들 때 우리는 충만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인도를 따라 행하는 삶은 말 그대로 축복받은 삶입니다. 이 능력이 우리 안을 채우게 되면 무슨 일을 당하건 이겨낼 수 있습니다. 여기에 플러스 인생으로 살아가는 능력의 원천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7-9절에서 바울은 이것을 질그릇을 담은 보배로 설명했습니다. 질그릇은 미천하고 연약합니다. 깨지기 쉽고, 약간만 건드려도 상처 나고 부서집니다. 그런데 그 안에 보배이신 그리스도를 담으면 달라집니다. 무슨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으며, 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그리스도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때 빛난 인생이 되고 당당한 인생이 됩니다.

 

미국의 어느 동네에서 풍선장수가 빨강, 노랑, 초록색의 풍선을 띄워 놓고 아이들을 모았습니다. 신기하게 생각한 아이들이 저마다 한 개씩 풍선을 사 가는데, 흑인 소년 하나가 머뭇거리다 물었습니다. "아저씨, 까만 풍선도 저렇게 높이 뜰 수 있나요?" 아저씨가 그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습니다. "물론이지, 풍선이 뜨는 것은 색깔 때문이 아니라, 그 속에 들어 있는 수소 때문이란다. 바른 것을 품으면 누구나 높이 하늘을 향해 오를 수 있단다."

우리 인생은 스스로의 힘으로 높이 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를 가득 채우면 비상할 수 있습니다. 더 높은 꿈을 향해 날아오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바울은 7절 마지막에서,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리고 세우심을 입으며 말씀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맺어야 할 궁극적인 열매가 바로 감사의 열매임을 언급합니다.

감사는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신 인생, 즉 성령 충만한 인생이 보이는 현저한 특징입니다. 내가 과연 성령 충만한 삶을 살고 있는가, 또 그리스도께서 내 삶의 주인이 되고 계시는가 하는 것을 객관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최근 내 삶에 감사함이 얼마나 넘쳐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오래 전 미국의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에 대한 전기가 발간됐습니다. 그의 아들 찰스 에디슨이 쓴 [전기 토마스 에디슨]이라는 책입니다. 그 책에 에디슨의 나이 67세 때 일어난 일화 하나가 소개돼 있습니다. 그 해 겨울에 에디슨의 실험실에 불이 났습니다. 그 안에 있던 온갖 기재들과 화학 용품들 그리고 그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들이 큰 불꽃을 이루며 타올랐습니다.

 

이것을 본 그의 아들 찰스는 아버지가 염려됐습니다. '혹시 아버지가 크게 상심하지 않으셨을까, 자신의 모든 것이 불더미에 쌓인 것을 보고 크게 낙심이 되셨을 텐데, 더구나 67세의 나이에 다시 시작하는 것이 쉽지 않을 텐데 ' 이런 생각으로 염려를 하고 있을 때 에디슨이 실험실에서 달려 나오며 외쳤습니다.

"네 엄마가 어디 있니? 빨리 가서 엄마를 데려와. 친구들도 모두 데리고 오라고 해. 이처럼 찬란한 불꽃은 그들 생전에 다신 볼 수 없을 거야!"

 

아니, 이럴 수가 있는 것입니까? 지금 67년간 쌓아왔던 자신의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되고 있는데,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화재를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아, 엄마 데려와! 이건 믿기 힘들 정도로 경이로운 불꽃 구경거리야!"라고 말하는 것이 이해가 가십니까? 이 말을 듣고 의아한 표정으로 서 있는 아들에게 토마스 에디슨이 말했다고 합니다. "아들아, 이 불은 어차피 우리가 끌 수 없는 불이야. 그러나 불길이 찾아왔다고 해서 웃음마저 잃어서야 되겠느냐? 하나님이 도우시면 다시 시작할 수 있어!"

 

여러분, 이것이 플러스 인생입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건 하나님 안에 있으면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확신, 그리고 그분이 능력을 주신다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믿음, 이것이 우리 인생을 일어나게 하고, 달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한 모든 자 안에 그리스도가 함께 계신 것을 믿으십니까? 생명이신 그리스도, 능력이신 그리스도, 지혜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지금도 우리를 인도하신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사람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또 그리스도를 따를 때 우리의 믿음과 이웃의 믿음이 세워질 것이며, 우리의 삶이 견고하고 풍성해질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능력의 지혜와 지식이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 모든 충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혜이신 그리스도를 붙잡음으로 그분과 함께 승리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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