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1. Daerew 4
  2. 메시지
  3. 주일예배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수 9장 1-15]

조회 수 1817 추천 수 0 2015.04.12 10:35:19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91-15]

 

1 이 일 후에 요단 서쪽 산지와 평지와 레바논 앞 대해 연안에 있는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의 모든 왕들이 이 일을 듣고 2 모여서 일심으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에 맞서서 싸우려 하더라. 3 기브온 주민들이 여호수아가 여리고와 아이에 행한 일을 듣고 4 꾀를 내어 사신의 모양을 꾸미되 해어진 전대와 해어지고 찢어져서 기운 가죽 포도주 부대를 나귀에 싣고 5 그 발에는 낡아서 기운 신을 신고 낡은 옷을 입고 다 마르고 곰팡이가 난 떡을 준비하고 6 그들이 길갈 진영으로 가서 여호수아에게 이르러 그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르되 "우리는 먼 나라에서 왔나이다. 이제 우리와 조약을 맺읍시다" 하니 7 이스라엘 사람들이 히위 사람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 가운데에 거주하는 듯하니 우리가 어떻게 너희와 조약을 맺을 수 있으랴?" 하나 8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하매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묻되 "너희는 누구며 어디서 왔느냐?" 하니 9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되 "종들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심히 먼 나라에서 왔사오니 이는 우리가 그의 소문과 그가 애굽에서 행하신 모든 일을 들으며 10 또 그가 요단 동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들 곧 헤스본 왕 시혼과 아스다롯에 있는 바산 왕 옥에게 행하신 모든 일을 들었음이니이다. 11 그러므로 우리 장로들과 우리 나라의 모든 주민이 우리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여행할 양식을 손에 가지고 가서 그들을 만나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는 당신들의 종들이니 이제 우리와 조약을 맺읍시다 하라 하였나이다. 12 우리의 이 떡은 우리가 당신들에게로 오려고 떠나던 날에 우리들의 집에서 아직도 뜨거운 것을 양식으로 가지고 왔으나 보소서. 이제 말랐고 곰팡이가 났으며 13 또 우리가 포도주를 담은 이 가죽 부대도 새 것이었으나 찢어지게 되었으며 우리의 이 옷과 신도 여행이 매우 길었으므로 낡아졌나이다" 한지라 14 무리가 그들의 양식을 취하고는 어떻게 할지를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15 여호수아가 곧 그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리리라는 조약을 맺고 회중 족장들이 그들에게 맹세하였더라.

 

오늘 말씀은 가나안 정복전쟁에 있어서 아이성 전투에 이어 이스라엘이 두 번째로 실수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실수가 성공 후에 오는 자만심으로 인한 것이었다면, 이번 실수는 하나님께 묻지 않고 결정함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영적전쟁에서 기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특히 무슨 일을 결정할 때는 반드시 기도를 앞세우며 매사에 기도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요단강을 기적적으로 건너고,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이 점령당한 소식을 들은 기브온 사람들은 자기들이 이스라엘을 이길 수 없음을 깨닫고 항복하기로 마음을 모았습니다. 그래서 멀리서부터 찾아온 나그네로 가장하여 화친의 언약을 청합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진정한 정체를 자세히 살펴볼 생각도 아니 하고 그들의 요청을 수락함으로써 하나님께 불순종의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가나안 족속들의 정면 공격보다 더 무섭고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만일 이들이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화친하면 결국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걸림돌이 될 게 뻔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 일로 심각한 결과가 주어집니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브온 족속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모든 가나안 족속이 자신들을 배신한 기브온을 공격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기브온과 화친을 맺었기 때문에 기브온을 돕기 위하여 전쟁을 해야만 하는 처지에 몰리고 맙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이들의 속임수에 넘어갔을까요?

 

첫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기대보다 자기들의 유익을 먼저 고려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시는가?'를 묻기보다 '나에게 무엇이 유익한가?'를 먼저 생각했던 것입니다.

 

지난 주 말씀에 아이 성 싸움에 이기고 나서 에발 산에서 예배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죄를 고백했다고 했습니다. 아이 성 승리 후에 하나님께 에발 산까지 가서 예배를 드렸는데, 이렇게 우리가 축복의 생명의 선택을 할 때마다 "이를 듣고" 세상의 모든 왕들이 모여서 일심으로 싸우려고 덤벼듭니다.

 

내가 성령 충만할수록 사단도 부흥회를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나에게 여러 종류의 영적 전쟁이 오는 것에 대해 죄책을 느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이기에 감사해야 합니다. 영적 싸움은 죽을 때까지 오는 것이니까, 내가 지금 잘 걸어가고 있다는 신호이기 때문에 감사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여리고와 아이 성과의 전투에서는 일대일의 싸움을 하였는데 이들 싸움만 해도 쉽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아이 성과의 싸움에서는 이스라엘이 패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강대한 가나안 족속 여섯 나라가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고자 하였습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그들을 위하여 도와주는 나라가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 사람이라도 돕는 자가 아쉬운 때였습니다. 바로 이때 기브온 거민들이 여호수아를 찾아와서 먼 나라에서 화친을 맺으러 온 것처럼 속여 약조하기를 원했습니다.

기브온 거민들은 바로 옆에 있는 히위 족속에 속한 사람들로서 왕도와 같은 큰 성이요, 장대하고 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10:2). 그런데도 그들은 이스라엘과 싸워서는 승산이 없음을 알고 어찌하든지 그들과 약조를 맺고자 꾀를 쓴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가나안 족속임이 드러나면 약조를 맺기 어려울 것을 알고는 멀리서 온 사신인 것처럼 교묘하게 그들을 속였습니다. 그들은 해어진 전대와 해어지고 찢어져서 기운 가죽 포도주 부대를 나귀에 싣고 왔습니다. 그리고 낡아서 기운 신을 신고 낡은 옷을 입고 바짝 마른 곰팡이 핀 떡을 가져왔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철저히 가장하여 여호수아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우리는 먼 나라에서 왔나이다. 이제 우리와 조약을 맺읍시다(6)."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볼 때 어딘지 모르게 수상한 점이 있어서, "너희가 우리 가운데에 거주하는 듯하니 우리가 어떻게 너희와 조약을 맺을 수 있으랴? 어디서 왔느냐?"하며 질문하였습니다. 그러자 얼른 그들은 자기들은 이스라엘의 종이라고 아첨하며 그들이 이곳까지 오게 된 동기와 경위를 말했습니다.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되 종들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심히 먼 나라에서 왔사오니, 이는 우리가 그의 소문과 그가 애굽에서 행하신 모든 일을 들으며 또 그가 요단 동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들 곧 헤스본 왕 시혼과 아스다롯에 있는 바산 왕 옥에게 행하신 모든 일을 들었음이니이다(9, 10)."

 

여기 들었다는 말이 계속 나옵니다. 3절에도 "기브온 주민들이 여호수아가 여리고와 아이에 행한 일을 듣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똑같이 들었는데, 가나안 연합군은 전쟁을 준비하고 기브온 족속은 화친을 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이 9, 10절은 기생 라합이 이스라엘 두 정탐꾼에게 한 말과 같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소문을 들었던 것입니다. 이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면, 자신들은 결코 이스라엘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안 것입니다. 이렇게 기브온 족속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소문이 결국 구원의 기초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기브온 족속들은 만일 화친의 언약만 맺어주면 자기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이 되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 볼 때 전혀 손해 볼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종이 되어 준다는 것은 얼마나 이해타산이 맞는 일입니까?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이 옳은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생각하기보다 "이것이 우리에게 유익한 일인가?"를 먼저 생각하여 그들의 행동 방향을 결정했던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행동 결정의 중요한 동기는 "이것이 올바른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유익하기 때문에, 이것이 나를 편하게 해주기 때문에, 이것이 나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기 때문이 아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현대를 가리켜서 실용주의 시대라고 합니다. 이 실용주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좋은 공헌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이 실용주의 사상은 그리스도인의 가치 판단에 중대한 혼란을 가져오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행동을 기대하시는가, 무엇이 올바른가?"를 생각하기보다 "어떤 일이 나에게 더 유익한가?"의 기준에서부터 우리 행동을 결정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전도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한 개척교회의 학생부를 맡고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굉장히 열정적이었고, 성실하게 학생부를 잘 가르쳐 갔습니다. 그러나 개척교회여서 헌금이 적어 학생부를 꾸며 나가는 것이 참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중학교 2학년 여자 아이가 회계를 맡고 있었습니다. 그 학생은 착하고 성실하고 믿음도 있어 보였습니다. 그리고 회계 일을 아주 잘 보았습니다.

어느 주일날 이 아이가 전도사님에게 예금 통장을 들고 찾아온 것입니다. "전도사님, 이것 좀 보세요. 제가 통장에 5천원을 일주일 전에 입금했는데, 지금 보니까 5만원이 입금된 것으로 되어 있어요."

 

전도사님이 확인해 보니 정말 그랬습니다. 은행원이 실수를 한 것입니다. 그 때 전도사님은 약간의 양심의 가책이 있었지만, "우리 학생부가 재정이 부족해서 하나님께서 채워 주셨는가 보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회계를 보던 아이도 아주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쯤 지난 뒤에 전도사님이 회계 장부를 보니, 회계를 보던 학생이 교회 헌금을 유용한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 때 전도사님은 이것이 어떠한 문제인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께 회개하고, 그 학생에게도 잘못한 것을 말하고, 그 학생과 함께 은행에 가서 이 사실을 밝혔습니다. 지금 이 친구는 현재 목사가 되어 목회를 잘 하고 있습니다.

 

우리 솔직히 한번 생각해 볼까요? 만일 성도님들에게 갑자기 1억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면 무엇을 먼저 생각하겠습니까? "이 돈을 받는 것이 옳은가?" 혹은 "정당한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겠습니까? 아니면 "이것을 통해서 나는 얼마나 이익을 얻을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겠습니까?

 

과거 청교도들은 정당한 노동 없이, 땀 흘리지 아니하고 쉽게 부자가 되고, 쉽게 출세하는 것을 치욕으로 여겼습니다. 우리들은 그들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우리 세대는 정당성과는 무관하게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의 죄를 범했던 동기였습니다.

 

둘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교 용어와 의식을 내용보다 중요시하였습니다.

 

본문 9, 10절을 보십시오. "9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되 "종들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심히 먼 나라에서 왔사오니, 이는 우리가 그의 소문과 그가 애굽에서 행하신 모든 일을 들으며 10 또 그가 요단 동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들 곧 헤스본 왕 시혼과 아스다롯에 있는 바산 왕 옥에게 행하신 모든 일을 들었음이니이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하신 일을 잘 아는 척하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이름'이라는 용어 때문에 기브온 거민에게 속았습니다. , 기브온 거민들이 '여호와의 이름'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그들의 종교의 실질 내용을 알아보기보다,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만 듣고 그들과 화친을 맺어도 좋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종교 용어나 종교 의식이 아니라 종교의 내용입니다. '내가 얼마만큼 예수님의 이름을 많이 부르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내 생활의 내용은 어떠한가, 하나님을 고백하는 그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가 훨씬 중요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교회 출입을 한 3년 정도 하면, 교회 용어나 성경 구절에 대해서 비교적 익숙해집니다. 그래서 종교적인 풍월을 읊는데, 우리는 별로 낯설지 않습니다. 처음에 그렇게 낯설었던 '하나님'이나 '주여'라는 외침이 어느새 서서히 익숙해지기 시작합니다. 찬송을 부르는 일에도 익숙하고, 성경을 펼치는 일에도 익숙해지고, 또 기독교 용어를 사용하는 일에도 그렇게 낯설지 않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것으로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종교적인 용어에 익숙하기 때문에, 혹은 종교적인 환경, 교회 환경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는 사실 때문에 그것으로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으로 간주해 버리는 오류를 범하는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라는 말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말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을 체험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정말 그리스도를 체험하셨습니까? 성령의 역사를 아십니까? 성령과 함께 동행하는 삶,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 그리고 성령께서 나를 지배하는 삶의 그 영광스러운 비밀과 내용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 한국 교회의 불행은 신앙 고백에 의해서 사람들을 대하기보다, 소위 신앙의 연륜에 의해서 사람들을 대하는 오류를 많이 범해 왔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몇 년 다니면 학습을 받아야 하고, 그 다음 얼마동안 일정한 시간이 흘러가면 세례도 받고, 그 다음에는 집사가 되고, 그 다음에는 장로가 되는 이 모든 과정을 밟고도 우리는 그 사람이 전혀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래 전에 중국에서 미국으로 스파이 한 사람을 파견한 일이 있었답니다. 중국에서는 이 사람을 완벽한 스파이로 만들기 위해서 그 많은 중국의 인구 가운데서 미국 사람과 가장 흡사한 얼굴을 가진, 모든 사람이 보아도 미국인으로 착각할 정도로 그렇게 아주 비슷한 인물 한 사람을 뽑았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유능한 정형외과 의사의 손을 빌어 미국인처럼 감쪽같이 수술을 했습니다. 그리고 오랜 기간 동안 그는 철저하게 영어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얼굴도 미국인처럼 생긴 데다 말도 미국인처럼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완벽한 준비를 한 후 이 사람이 미국에서 스파이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이제 미국인이 된 것입니까?

 

그를 보는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그가 미국인처럼 말하고, 행동하고, 또 미국인처럼 생겼으므로 이 사람을 틀림없이 미국인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의 피는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나는 미국인이 아니야!"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종교적 용어나 종교적인 어떤 환경에 익숙하다는 사실 때문에 자기 신앙의 성찰을 기피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후 135절에서 이렇게 도전합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오늘 우리 시대는 십자가가 걸려 있다고 해서 그것을 교회로 판단하기에는 너무나도 진리를 떠난 시대가 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십자가가 달려 있지만, 교회가 아닌 교회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목사가 아닌 목사도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의 세태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여 보라."

 

우리 주님께서는 마 722, 23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주여, 주여"라고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소리를 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내가 도무지 너희를 알지 못한다"하실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종교적인 용어, 종교적인 의식이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나 종교적인 내용이 없이는 그 용어나 의식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느냐? 그것을 보아야 합니다. 종교적인 용어와 의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내용입니다. 참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했는가?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는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셋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기브온 거민의 속임수에 여호수아와 회중의 족장들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14, 15절을 보십시오. "14 무리가 그들의 양식을 취하고는 어떻게 할지를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15 여호수아가 곧 그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리리라는 조약을 맺고 회중 족장들이 그들에게 맹세하였더라."

그들은 기브온 거민들이 가져온 곰팡이 핀 양식을 보고는 멀리서 온 사람들임을 확신하고 그들과 언약을 맺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들이 실수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어떻게 할지를 여호와께 묻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여호수아와 족장들은 그들과 약조하는 일을 나름대로 신중하게 결정하고자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하였지만, 결정적으로 기도는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의 교묘한 거짓말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 성에서의 싸움을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열심히 기도했고, 하나님께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아이 성의 전투에서 패배를 경험한 다음에도 그들은 다시 주님 앞에 엎드려 진지하게 하나님의 인도를 구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어떤 사람들이 뇌물을 가지고 와서 그들이 종이 될 것을 조건으로 화친을 요청해 오자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서 결정을 서둘렀던 것입니다.

 

우리는 큰 문제 앞에서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대단히 어려운 상황이 벌어졌을 때, 우리가 난처한 궁지에 빠졌을 때는 주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 문제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십시오."

그러나 작은 문제에 대해서는 기도하지 않고 혼자서 결정해 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작은 문제가 우리를 결정적으로 넘어뜨리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니는 위기의 시절에 블레셋 사람이 그일라를 침공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때 다윗은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 그일라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민족이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마음 아프게 생각하고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내가 이 블레셋 사람을 치리이까?"

하나님은 다윗에게 블레셋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함께 있던 사람들이 벌떼 같이 일어나 지금 자기들의 생명을 부지하기도 어려운 때에 블레셋과 싸운다는 것은 위험천만이라고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시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블레셋과 싸우는 것임을 확신하고는 올라가 싸웠습니다. 이로써 그는 큰 승리를 거두고 그일라 거민을 구원하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뒤 사울이 다윗을 추적하여 그일라까지 따라 오게 되었습니다. 이때 다윗은 크게 은혜를 덧입은 그일라가 이런 위기의 때에 자기들을 도와줄 것이라 믿고 안이하게 지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때도 하나님께 나아가 물었습니다. "그일라 사람들이 나와 내 사람들을 사울의 손에 붙이겠나이까?"

그러자 하나님은 그일라가 다윗을 배반할 것이라고 일러주셔서 다윗은 위기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자기 판단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가 물었습니다. 그가 매사에 하나님께 나아가 물었을 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갈지라도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이 생명의 길, 승리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99번 잘 하다가도 한 순간 방심하여 깨어 기도하지 않는다면, 사단은 그 약점을 놓치지 않고 우리를 공격하여 넘어뜨립니다. 우리가 일이 잘될수록, 성공할수록,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을수록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기에 힘쓰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호수아와 백성들은 중요한 순간에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나름대로 판단하고 결정하였을 때 가나안 거민과 조약을 맺어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죄를 범하게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가나안 거민과 조약을 맺은 것은 어떤 점에서 큰 잘못이었습니까?

하나님은 이미 모세에게 그 땅의 거민들과 언약을 맺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상들을 음란히 섬기며, 그 신들에게 희생을 드리며 결국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이었습니다(34:15). 그러므로 그들과 화친을 맺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은 이 조약으로 인하여 동맹군을 얻어서 큰 보탬이 된 것이 아니라, 그들로 인하여 나머지 가나안 족속들이 연합하여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됨으로써 더 큰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물질이나 사람을 의지하면 점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되고, 결국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또 물질이나 사람을 의지할 때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습니다. 물질을 의지하다보면 마음에 욕심이 생겨 다른 사람과 관계가 깨어지게 되고, 공동체에 사단이 역사하는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습니다.

 

이 조약은 그 당시만 손해를 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상 두고두고 상처를 입히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오랜 후에 사울 왕이 이 조약을 어기고 기브온 거민들을 죽이므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은 삼년동안 기근에 시달리게 되었고, 사울의 자손들 중에 일곱 명이 희생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근시안적인 사람의 판단이나, 당장의 유익을 따라 조급하게 일을 결정하는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주시고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십니다.

 

특히 장래 방향을 정하는 일이나, 결혼과 같은 중요한 문제를 결정하는 일들은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묻고 하나님의 뜻대로 결정하고 행하는 기도의 종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다행스럽게도 비극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관용을 베푸셨습니다. 그들은 처음에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아니하고 화친의 결정을 내리는 잘못된 결정을 하였지만,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했으므로 이 기브온 거민과의 화친의 맹약을 지켰습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맹세를 하였으면 어떤 손해가 있더라도 그것을 지키기를 원하십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불신하고 하나님과 맺은 약속을 쉽게 버리지만 하나님은 한 번도 약속을 어기지 않으시고 신실하게 지키셨습니다.

 

우리 신자들은 이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그 언약을 지키며 사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신실성을 닮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한 번 한 약속은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변치 않고 그대로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여호수아는 한 번 실수를 했지만 조약을 깨는 또 다른 실수를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나무를 패며 물 긷는 일은 종이나 이방인들 같이 천한 신분의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전쟁으로 인하여 멸망당하는 심각한 화는 면하였지만 영영히 종이 되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공의를 행한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큰 실수를 범했지만, 실수로 인하여 절망하고 죄의식에 빠져 주저앉지 않고 이를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해결하였습니다. 우리의 처음 결정이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아니하여 잘못된 것이었을 경우 지금부터라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문제로 인하여 분열의 위기가 생기게 되었을 때도 여호수아는 이를 방치하지 않고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해 나갔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맺은 언약을 파기하지 않았으며, 죄 문제를 결코 간과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공의를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일일이 묻는 것은 때로는 시간 낭비인 것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으면 그 결과는 실패와 낭패뿐입니다. 우리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항상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한 실수했을 때라도 절망하지 말고, 하나님께 문제를 다시 들고 나가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과 뜻 가운데 해결함을 받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파일 첨부

여기에 파일을 끌어 놓거나 파일 첨부 버튼을 클릭하세요.

파일 크기 제한 : 0MB (허용 확장자 : *.*)

0개 첨부 됨 ( /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6 시험과 유혹[약 1장 12-15] secret 홍목사 2015-04-12  
15 자랑할 것을 자랑하라[약 1장 9-11] secret 홍목사 2015-04-12  
14 지혜가 부족하거든[약 1장 5-8] secret 홍목사 2015-04-12  
13 시련이 주는 유익[약 1장 2-5] secret 홍목사 2015-04-12  
12 시험 속의 기쁨[약 1장 1-3] secret 홍목사 2015-04-12  
11 실패 이후의 조치[수 9장 16-27] secret 홍목사 2015-04-12  
»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수 9장 1-15] 홍목사 2015-04-12 1817
9 새로운 헌신[수 8장 30-35] secret 홍목사 2015-04-12  
8 새로운 시작[수 8장 1-9] 홍목사 2015-04-12 386
7 실패를 성공으로[수 7장 1-15] secret 홍목사 2015-04-12  
6 여리고를 무너뜨리는 믿음[수 6장 1-11] secret 홍목사 2015-04-12  
5 여리고 앞에서[수 5장 1-15] secret 홍목사 2015-04-12  
4 신앙의 기념비를 세우라 [수 4장 4-9, 19-24] secret 홍목사 2015-04-12  
3 요단을 건너려면[수 3장 1-13] 홍목사 2015-04-12 1988
2 라합의 믿음[수 2장 1-11] secret 홍목사 2015-04-12  
1 그리하면 형통하리라[수 1장 1-9] secret 홍목사 2015-0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