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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것만도 은혜입니다

조회 수 45 추천 수 0 2021.09.11 12:30:21

살아있는 것만도 은혜입니다.

 

 

중학교 때 내가 존경하던 선생님께서 사람을 곤충에 비유해서 세 가지 군으로 나누어 교훈 하시던 적이 있다. 곧 거미와 같은 사람, 개미와 같은 사람, 그리고 벌과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거미와 같은 사람은 세상에 해를 끼치는 사람으로, 세상에 없었으면 좋을 사람이라는 것이다. 거미는 어둡고 음습한 곳에 포충망을 쳐놓고 다른 곤충들을 약탈하는 것으로 살아가는 존재다.

 

사람도 이와 같이 남을 해침으로써 살아가는 존재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에 있는 것보다 없으면 좋을 사람들이다.

 

두 번째로 개미는 거미처럼 무위도식하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일을 한다. 그러나 그 열심히 수고함이 자기 외에는 어떤 것에도 유익함을 주지 않는다. 물론 해도 주지 않지만 그래서 있으나마나한 존재다 사람도 이와 같은 존재들이 있다.

 

열심히 일하고 살지만 자기만을 위하여 쌓고, 모으는 데만 인생의 의미를 두고 사는데 나의 존재가 세상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다면 좀 극단적인 말이지만 그 존재가 있으나마나한 것이다.

 

그러나 세 번째로 벌은 열심히 일도 하지만 그 결실로 꿀을 남기는 유익한 존재다. 사람도 이와 같이 세상에 보탬이 되는 사람들이 있다. 없어서는 안될 필요한 존재다.

 

그때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힘주어서 말씀하셨다.

 

"벌과 같은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사람값이다."

 

이런 논조가 조금은 극단적이고, 우화적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분명 거미와 같이 차라리 없는 것이 더 좋은 사람이 있고, 개미와 같이 있으나마나한 사람도 있으며, 벌과 같이 반드시 있어야 할 사람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영국의 봉건시대에 레오프리라는 백작이라는 악명 높은 영주가 있었다. 그는 코벤트리시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백성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여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허덕였다.

 

그러나 그의 아름다운 아내 고다이바는 마음씨가 착해서 늘 백성들의 세금을 가볍게 해달라고 애원을 했다.

 

냉혹한 백작은 번번이 거절했지만, 아내가 워낙 간절히 애원해 오는지라, 이를 아예 두 번 다시 입 밖에 내지 못하게 할 심산으로 농담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이 대낮에 알몸으로 이 시가지를 한 바퀴 돌아오면 당신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하지."

 

이런 조건이면 아예 다시는 입도 뻥긋 못하리라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고다이바 부인은 그의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 사연을 전해들은 시민들은 감격하여서 영주의 부인이 알몸으로 거리를 지나갈 때 누구도 일체 보지 않기로 하고 집집마다 창문을 닫고 커튼을 내리기로 약속을 했다.

 

드디어 영주의 부인은 대낮에 알몸으로 거리를 지나갔다.

 

그런데 시민들의 약속을 어긴 한 사람이 있었다. 톰이라는 사나이가 문틈으로 그것을 엿보았는데 그만 그는 벌을 받아서 장님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

 

콘벤트리 연대기에도 실려있는 이 이야기는 지금도 그 곳에서는 고다이바 부인의 덕행을 기리는 축제를 지내고 있다고 하며, 영어에 Peeping Tom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뜻은 '엿보기를 좋아하는 놈'이라는 욕설로 사용되고 있다. 여기에도 거미인이 있고, 개미인이 있으며, 벌의 사람이 있는 셈이다.

 

나는 가끔 지금도 내가 어디에 속한 사람일까 하고 생각해보곤 한다. 내가 먹는 밥, 내가 입는 옷, 내가 쓰는 물건들 이 모든 것들이 많은 사람들의 수고와 노력의 땀으로 내 손에 들려진 것이다.

 

옛말에 일미칠석이라는 말이 있는데 쌀 한 톨이 있기까지는 일곱 말의 땀을 흘렸다는 것인데 나는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고, 얼마나 대가를 지불하고 이것들을 쓰고 있나를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나는 뭔가 빚을 지고 있는 것만 같다.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더 많은 인생, 그러니 편안한 것도 미안하고 죄스럽기만 하다.

 

어느 나환자촌 입구에 쓰여진 팻말이 생각난다.

 

"살아있는 것만도 은혜입니다."

 

 

고생이 약이다.

 

 

 

옛 시조에 이런 멋진 것이 있다.

 

늦장마 잔 칼질에

뼈만 남은 비탈길을

한 송이 들국화

제 철이라 꾸몄구나.

나그네 지친 장대를

여기 꽂고 쉴까나.

추운 늦장마에 휩쓸려 을씨년스러운 산비탈인데 감격스럽게도 들국화 한 포기가 의연하게 서있더라는 것이다. 그 의연함, 그 해맑은 웃음이 거의 쓰러지도록 지친 이 나그네에게 신선한 새 힘을 주었다는 노래다.

 

아름다움에도 여러가지가 있는데 이 들국화 같은 굳센 의지가 주는 아름다움이 있다. 모두가 지쳐 버린 것 같은 늦가을의 산하, 차가운 비바람에 을씨년스러운 풍경, 그 가운데에 유독 홀로 정정하게 서 있는 들국화의 자태는 술고한 느낌을 주는 의지적인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

 

내가 아는 어떤 분은 한 겨울에도 냉수마찰을 하는 습관을 가지셨다. 놀래서 구경하고 있으면 "찬 맛이 참 좋다."고 하셨다.

 

인생도 찬 맛을 음미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사는 맛을 알게 된다.

 

"달이 암만 밝아도 쳐다볼 줄은 예전엔 미쳐 몰랐어요."하는 소월의 시는 괴로움이 있었기에 달의 아름다움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인생의 귀중한 경험을 말해주고 있다.

 

이 세상에 값있는 일들은 대부분 고통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들이다. 록펠러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부자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부를 그의 자녀들이 이어받고 있다. 대부분 재벌의 자녀들이 허랑방탕한데 반하여 록펠러의 자녀들은 아주 휼륭한 재벌이자 신앙인이자 사회사업가들이다. 거기에는 아버지 록펠러의 교육이 있었다. 자녀들은 모두 신문배달, 우유배달, 세차장에서 차딲기 등을 시켜 용돈을 벌게 했고, 대학에서도 스스로 학비를 벌게 했다.

 

강철왕 카네기는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나라에 학교, 도서관 등을 세워 번 돈을 사회에 돌려 주어 칭친 받는 부자들 중의 한 사람이다. 카네기에게 영국의 조단이라는 기자가 물었다. "당신처럼 돈을 잘 쓰고도 돈을 지킬 수 있는 비결이 무었입니까?" 그러자 카네기는 즉시 대답을 했다. "입술을 물고 울어 본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증기기관차를 발명한 제임스 와트도 처음엔 연구할 돈이 없어서 깡통을 모아서 펴 써야만 했었다.

 

발명왕이라고 불리는 에디슨은 1천 종류의 발명 특허를 따냈다. 1931년 에디슨이 84세로 눈을 감자 전 미국 국민은 그 날 밤 10시부터 10분간 미국의 모든 전등불을 꺼서 천재의 위대한 업적을 기렸다. 그러한 에디슨은 집안이 가난하여 12살 때부터 기차 안에서 신문팔이를 해야만 했었다.

 

스토우 부인이 쓴 '엉클 톰스 캐빈'은 남북전쟁 때 미국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어서 링컨이 노예해방을 하도록 만든 정신적인 뒷받침을 한 책이다. 그런제 이 책의 원고를 스토우 부인은 포장지 안쪽에 써야할 만큼 가난했었다고 한다. 불후의 명작이라는 밀턴의 실낙원은 밀턴이 눈이 멀고 정치에서 밀려나서 병든 몸으로 오두막집에서 누워서 딸에게 구술하여 쓰여진 것이다.

 

실로 이런 예를 들려면 한이 없겠다. 분명한 것은 그것이다. 괴로움과 고통 속에서 값있는 것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도 고통을 통해서 알게 된다. 이 세상이 천국이라고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자지에게 능력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

 

한국 속담에 "고생이 낙이다."라는 말이 있다. 고생이 낙이 된 것은 상당히 달관한 경지일테지만 고생이 약인 것만은 누구에게나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다.

 

고생을 낙으로까지는 못삼아도 고생을 약으로는 삼아야 한다. 그래서 고난이 삐뚤어진 인격을 바로 세우고 연약한 인격을 강하게 하는 인생 보약이 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고등학교 때 좋아하던 김동명씨의 노래가 있다.

 

"그대는 차디찬 의지의 날개로

끝없는 고독의 위를 날으는

애닯은 마음

또한 그리고 그리다가 죽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

또 다시 죽는..."

 

박사가 된 요기베라 선수

 

 

뉴저지의 몽클레어 주립대학은 요기베라(Yogi Berra)씨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요기 씨는 전세계가 아는 미국 야구계의 전설적인 인물이다. 양키즈 팀의 홈런 타자로 이름을 날렸으며 코치와 감독 등으로 또한 유명했다. 그런데 몽클레어 대학이 수여한 학위는 체육 부문이 아니라 문학박사였다. 그의 영어 구사력, 문장력 등이 많은 그의 저서를 통하여 인정을 받은 것이다. "다 끝날 때까지는 아직 안 끝났다. (It isn't over till it's over.)"를 위시한 그의 많은 저작들이 한결같이 유모러스한 표현으로 인생을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지혜를 말한 것들이다. 올해 그의 나이가 71세인데 젊어서부터 그의 신조는 어떤 경우도 불평을 말고 적극적으로 살자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의 성공과 행복의 비결이었다.

 

요기베라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가 양키즈 팀의 타자로 있을 때, 양키즈 팀이 위기에 처했다. 요기는 타석에 나와서 자기가 선 땅에 십자가를 그었다. 기도하는 마음이었던 것이다. 그때 투수가 요기에게 농담 반 시비 반으로 말을 걸었다.

 

"나도 카톨릭 신자인데 자네는 안타를 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나는 자네를 아웃 시키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누구의 기도를 들으시겠는가. 그러니 이번에는 하나님은 관중석에 앉아서 구경만 하게 하세." 그러자 요기가 말했다. "우리 목사님이 말씀하시길 하나님은 구경만 하시는 것을 가장 싫어하시고 믿는 자들과 함께 일하신다고 하셨네." 이 입씨름에 심판도 웃었고, 포수도 웃었지만 그리고 나서는 정말 요기는 홈런을 날려 버렸다. 요기가 어떤 순간에도 적극적으로 살았다는 일화이다.

 

그대가 불평을 말할 때 두 가지만 알아두어라. 그대의 불평을 듣는 사람의 절반은 그대의 이야기에 관심이 없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그대에게 골치 아픈 일이 생겼다는 사실을 재미있는 얘깃거리 정도로 듣고 즐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불평을 해서 그대는 조금도 도움을 얻을 수 없고 손해만 볼뿐이다. 그대가 가죽장갑이 없음을 불평할 때, 손이 없는 사람을 생각해 보라. 그대가 유명상표의 구두를 못신을 때 발이 없는 사람을 생각해 보라.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많이 불평했다. 그래서 그들은 3개월에 갈 수 있는 가나안 복지를 40년이 걸려서 가게 되었다. 불평은 하나님의 축복을 지연시키는 것일 뿐이다.

 

미국의 운동선수들은 알콜, 여자관계, 마약, 폭행 등으로 팬들을 실망시킨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요기베라는 선수로서 3번이나 MVP(최우수 선수)가 되었고, 홀 오브 패임(Hall of Fame)에 오른 실력자였지만 한번도 나쁜 스캔들이 없었다. 그는 너그럽고 인자하며 늘 절제하면서 산다고 존경을 받아왔다.

 

성경에 루우벤을 가리켜 "거친 파도와 같다."(창49:4)고 말한다. 그의 인격이 변화 무쌍하고 험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는 장자로 태어났지만 장자의 축복을 누리지 못했다.

 

인격은 그 사람의 운명이 된다 그리고 그 인격이란 시련과 고통이 왔을 때야 참모습을 알 수가 있다. 옛날에는 집에서 돼지 먹이를 주기 위해서 구정물을 받았는데 구정물이 맑게 보이지만 휘저으면 온갖 더러운 것들이 다 떠올라 왔다. 인격도 건드려 보면 어떤지 알 수 있는 것이다.

 

'결국의 복'을 받았다는 욥은 그의 인격이 변함이 없었다. 아무리 재난이 오고 그의 아내가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라."는 말에도 욥은 누구를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다. 이런 인격이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이다.

 

더 나은 인격자가 되기 위하여 그대에게 몇 가지를 권고한다.

 

언쟁을 피하고 친구를 소중히 여겨라./ 의심하지 말고 신뢰하라./ 약속을 지키고 원수를 용서하라./ 남의 말을 경청하고 잘못을 신속히 사과하라. 너무 부러워 말고, 샘내지 말라./ 감사의 말을 아끼지 말고 웃는 얼굴을 하라./ 받으려고 하지 말고 주려고 하라./ 적극적으로 살아라./ 진실하고 단순하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인격을 위해서 기도하라.

 

행복의 조건

 

 

누구나 행복을 원한다. 그런데 그 누구나 원하는 행복에는 두 가지 조건이 채워져야 한다. 하나의 조건은 흔히 말하는 축복이란 것이다. 이 축복을 옛사람들은 '수부귀다남자'라고 했다. 이러한 것이 행복의 한 요소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여기에 반드시 더해져야 할 것이 있는데 '보람'이란 것이다. 축복이라는 행복의 조건은 보람이 없이는 그것만 가지고는 행복할 수가 없지만, 보람은 축복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축복보다도 보람이 더 큰 행복의 조건임을 알 수가 있다.

 

흔히 사람들이 쉽게 좋아하는 것에는 보람이 적은 것이고, 하기 싫은 것, 어려운 것, 시간이 걸리는 것 등에 큰 보람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보람은 즉석에서 느끼지 못하는 것들이 많다. 땀을 흘린 뒤, 눈물을 흘린 뒤, 피를 흘린 뒤에야 보람이 온다.

 

사람은 보람의 순위에 따라 행동한다. 돈에 보람을 느끼는 사람은 돈에 먼저 손이 가고, 하나님의 일에 보람을 느끼는 사람은 십자가를 지는 일을 먼저 우선 순위로 생각한다. 사실 보람은 받는 보람도 있지만 주는 보람이 훨씬 더 큰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비결을 알지 못한다. 칭찬 받을 때에도 보람이 있지만, 욕을 얻어먹을 때에도 더 큰 보람의 씨앗이 그 속에 들어 있을 수 있다. 사는 보람도 있지만 죽는 보람도 있다.

 

97년 2월 미국의 한 고속도로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 리무진(고급승용차)이 밤길을 달리다가 타이어가 터졌다. 리무진의 뒷자리에 앉은 신사는 몹시 화가 났다. 중요한 회의 시간이 촉박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났고 스페어 타이어까지 바람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신사는 운전기사를 몹시 책망했다. 사고서비스회사에 전화를 걸어 놓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지나가던 차가 한 대 멈추었다. 허름한 노동자 차림이었다. 그는 타이어 사이즈를 보더니 자기 차와 같다고 하면서 자기의 스페어 타이어를 꺼내서는 손수 갈아 끼워주기까지 했다.

 

작업이 끝나고 리무진의 창문이 스르르 열렸다. 리무진에 앉은 사람은 억만장자 도날드 드럼프씨었다. 그러나 노동자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드럼프씨가 말했다. "정말 고마운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노동자가 농담처럼 말했다. "정 고마우시다면 며칠이 있으면 발렌타인데이인데 그때 내 아내에게 장미 몇 송이를 보내주시오."하면서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다.

 

며칠 후 이 집에 장미 열두 송이와 봉투 한 개가 배달되었다. "당신 집의 융자금을 모두 청산했습니다. 이제 당신의 집은 완전히 당신의 집입니다. 당신의 봉사와 헌신에 대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기쁘게 받아주시오."

 

미국은 주로 은행에서 모기지(mortgage)라는 은행융자금으로 집을 장만하는데, 이 대부호 드럼프씨가 봉사를 베푼 사람의 신원을 조사해서 그의 융자금 7만 달러(8천만원)를 모두 갚아 준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꼭 이런 방법으로 우리의 융자금을 갚아주시지는 않지만, 하나님은 더 많은 방법으로 더 중요한 일로 우리의 헌신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성경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말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의 처지와 형편을 살피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헌신을 짐으로 생각하지 말고 또 하나의 씨를 심는다고 생각하면 기쁘게 감당할 수 있다. 작은 헌신을 기쁘게 감당한 자에게 큰 헌신이 맡겨진다는 것이 하나님의 원칙이다. 그리고 큰 헌신에는 반드시 큰 헌신을 할 수 있는 능력도 함께 주어지는 것이 또한 하나님의 원칙이다. 그러기에 성공의 첫걸음은 오늘 나에게 주어진 작은 일을 기쁨과 성실로 마치는 것이다. 숙제를 제대로 하지 않는 아이는 학교에 갈 즐거움이 없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 앞에 살아온 생활이 있으면 신앙은 짐이 아니라, 즐거움이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 누구나 행복을 찾아 노력한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재물을 모아도 그것만으로는 행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진정한 행복은 보람이 있을 때이다. 그리고 보람은 헌신과 희생에 비례해서 오는 법이다. 고로 헌신과 희생이 없이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진통(陣痛)

 

산고를 겪을 때 모든 여성들은 다시는 아기를 안 낳겠다고 결심한다고 한다. 아기를 낳을 때 207개의 모든 뼈가 흔들리고 살이 늘어난다고 하니 그 아픔이야 나 같은 남성 따위는 죽을 때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하는 고통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결심을 한 여성들이 둘도 낳고 넷도 낳고, 내가 아는 어떤 분은 14명의 아들딸을 낳았다. 어째서 일까? 그것은 '뒤의 기쁨'이 '앞의 고통'을 잊어버리게 하기 때문이다.

 

환희는 아픔을 삼키는 마술을 지니고 있다. 둘째, 셋째, 열째까지의 아기를 임신하는 것은 '결과의 기쁨'이 '과정의 고통'을 삼켜버리는 경험을 여성들이 맛보았기 때문이다.

 

오늘의 진통은 내일의 행복을 준비한다. 좀 더 나아가 현재의 아픔 없이는 내일의 행복을 기대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귀여운 자식은 혼자서 여행을 시켜라."는 말이 있듯이 고생의 맛을 알아야만 행복의 맛도 아는 것이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살기가 힘들다고들 하지만 옛날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20년 전만 해도 석유를 연료로 쓰는 것은 상당히 부유층들이었고, 승용차를 소유한 것은 최상급의 생활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몸을 던져 부딪칠 각오만 있으면 얼마든지 일용할 돈을 벌 수 있는 길이 있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겨울철 놀이로는 팽이치기가 으뜸이었다. 끈이 달린 팽이채로 팽이를 친다. 무자비한 것 같아도 팽이는 쳐야 돌지 잠깐만 내버려두어도 쓰러져 버리고 만다. 팽이가 갈채를 받을 때는 아파하면서도 돌고 있을 때이지 누워 있을 때가 아니다. 팽이에 크레용으로 색칠을 해서 돌리면 정말 멋이 있었다. 아픈 채찍 속에서 아름다운 율동이 창조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아픔과 고난을 거쳐서 아름다움과 갈채와 행복이 탄생한 것이다.

 

나는 곰이 사람으로 변했다는 단군신화도 우리 조상들의 그런 지혜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되고 싶은 곰과 호랑이가 굴속에 들어갔는데 100일 동안을 마늘과 쑥만 먹고살아야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조건이었다. 호랑이는 어둠과 거친 음식을 견디지 못하고 뛰어나온다. 그러나 곰은 매운 마늘을 참고 씹었으며 쓴 쑥을 지긋이 삼켰다. 그리하여 마침내 곰이 사람(여자)으로 바꾸어진다. 적어도 사람이 되려면 그만한 아픔은 견뎌야 한다는 것이 우리 조상들의 인간관이었다.

 

구약성경에도 쓴 나물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하기 전날 밤에 쓴 나물과 누룩을 넣지 않은 맛없는 빵을 먹었다. 이것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그리고 노예생활에서 해방되려면 적어도 그런 고통의 과정을 거쳐야 된다는 하나님의 지시였다. 동시에 아픔과 고난을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과정으로서 해석한 것이었다.

 

우리가 옛날 이야기를 할 때 즐거웠던 일은 별로 재미가 없다. 그러나 괴로웠던 경험을 회상하며 이야기하면 그렇게 신나고 재미있는 것은 아픔이 기쁨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사는 세상은 고통이 없는 곳이 없다. 깨끗한 것만 있는 곳도 없다. 고통이 있으면 달게 받자. 찬 맛도 맛볼 줄 알아야 한다. 아픔이 있으면 정면으로 받아들이자. 마치 초등학교 때 무서운 예방주사기 앞에 팔뚝을 걷어올리듯이 진통을 피할 것이 아니라 굳세게 겪어내서 그 속에서 내일의 기쁨을 뽑아내자 진통 없이 좋은 것은 태어나지 않는다.

 

나는 홍시 감을 좋아하는 편인데 어떤 감이 홍시 때 단감인 줄을 알고 있다. 그것은 푸를 때 떫은감이 홍시 때 달다. 많이 떫을수록 홍시 때는 그만큼 달다. 푸를 때 단감이 익으면 아무 맛도 없게 된다. 또 떫은감이 오래간다. 인생에 떫은맛을 많이 본 사람이 달콤하고 성숙한 인생이 된다.

 

 

받은 것 없이 예쁜 사람

 

 

흔히 사람들이 하는 말에 "준 것 없이 미운 사람이 있고, 받은 것 없이 예쁜 사람이 있다."는 말이 있다. 남에게 준 것 없이 밉게 보인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인간관계에서 실패한 사람이요, 받은 것 없이 좋게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많은 재물을 가졌거나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보다도 훨씬 귀중한 무형의 재산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어떻게 하면 이 무형의 자산을 지닌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첫째, 남의 이름을 잘 기억하도록 하라. 카네기도 성공의 첫째 비결을 말할 때, 남의 이름을 잘 기억해주는 것이라고 했다. 사회가 점점 전문화, 집단화되어 가는 세상에 자기의 이름이 기억되는 일은 아주 기분이 좋은 일이다. 이름이란 고유명사다. 보통명사는 늘 도매금이다. 사람은 도매금으로 넘어가길 싫어한다. 그래서 자기의 이름이 기억되면 특별한 대우를 받는 것처럼 으쓱해진다. 나도 내 이름이 좀 우스꽝(?)스럽지만 누가 내 이름을 불러주면 기분이 좋아진다.

 

둘째, 무뚝뚝한 태도를 갖지 말라. 다정함보다 나은 사교술은 없다. 찌푸리고 있는 표정은 옆에 가기도 부담이 되어 사람을 쫓는다. 똑똑하고 야문 체하여 사람에게 거부감을 주는 것보다 다소 허술한 면이 보여도 웃는 얼굴과 가까워지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셋째, 칭찬을 아끼지 말라. 남을 칭찬해 줄 조건을 찾아라. 이 세상에 단 한 가지의 장점도 갖지 않은 사람이 없다. 얄팍한 아부나 아첨이 아니라 마땅히 좋은 점을 찾아서 적당히 칭찬해 주면 그것처럼 인간관계에 보약이 되는 것은 없다. 반대로 사람마다 단점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그 단점만을 찾아서 말하는 것처럼 인간관계의 독약 또한 없다. 단점을 말하는 것은 비평이 아니라 비난이다. 남의 갑옷에서 구멍을 찾을 때, 어느새 상대의 화살은 내 뚫어진 갑옷에 꽂혀 있게 된다.

 

넷째, 남의 기분을 무시하지 말라. 누군가가 좀 들떠있거나 내 기분과 같지 않은 상태에 빠져 있을지라도 그 기분에 찬물을 끼얹지 말라.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라는 말이 있다. 감정을 무시당한 것은 오래오래 쓴 기억으로 남는다. 김재규가 차지철을 쏜 것은 어떤 뚜렷한 계획이나 원한 때문이 아니라 전에 무시당한 앙금이 폭발한 것이었다. 남의 감정을 받아주면서도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지도자의 첫째 자격이다.

 

다섯째, 섬기는 정신을 잃지 말라. 하급인생은 받기만 하는 사람, 중급인생은 주고받는 사람, 상급인생은 주고, 받을 생각을 안하는 사람이다. 섬기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르고 존경하고 아끼게 된다. 고독한 사람은 섬기지 않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기적인 사람은 고독하다.

 

여섯째, 믿어주는 마음이 성공적인 인간관계의 필수요건이다. 의심하는 것은 불쾌함을 넘어서 배신감까지 갖게 한다. 가장 든든한 끈은 "나는 너를 믿는다."이다. 심지어는 다 불신해도 "나만은 너를 믿는다."고 할 때, 그 사람이 내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의심, 질투, 불신, 넘겨짚음 등은 인간의 정을 찢어버리는 면도날이다. 신뢰 하나만 빠지면 더 이상 부부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고, 가족도 아니다.

 

일곱째, 진실하라. 진실은 아름답다. 진실은 힘이 있다. 진실은 따뜻하다. 진실하면 실수마저도 좋아진다. 진실이라는 말보다 조금 구체적인 말이 있다. '솔직'이라는 말이다. 포장하지 않은 체, 내 모습 그대로가 친근함을 준다. 누구나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어한다. 항상 미소 지으며 남의 허물도 따뜻이 감싸주고 내 기분을 이해해주며 나를 믿어주는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어한다.

 

 

행복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과 차 한잔을 나누는 순간에 있는 것이다. 이 가을, 사람이 그리운 계절이다.

 

 

스트레스

 

 

 

 

스트레스는 정신적인 압박감이나 긴장을 뜻하는 말이다. 이 스트레스는 미음의 상태지만, 현대 의학에서는 모든 병의 원인이 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스트레스를 잘 극복하는 것이 건강의 중요한 비결이기도 하다.

 

미국 보건성에서는 스트레스가 국민의 건강을 해친다는 보고서를 내고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는 열 두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쫓기지 말라. 그러려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서 아침에 여유를 가져라.

커피나 탄산음료를 마시지 말라. 대신 물이나 주스를 마셔라.

일의 우선 순위를 정하고 급하고 중요한 일부터 하라. 그러나 서두르지 말라.

할 일이나 약속 등을 적어라. 기억 속에 입력하는 것은 뒤에 짐이 된다.

무슨 일이든지 성실히 하되, 완전무결하려고 하지 말라.

쉬는 시간을 가져라. 쉬는 것같이 일하고, 일하는 것처럼 쉬지 말라. 일할 때는 일에 몰두하여 최대한 일 자체를 즐길 수 있도록 하고, 쉴 때는 완전히 일을 잊어라.

소음을 줄여라. 소음이 사람의 신경을 나쁜 쪽으로 자극한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거리의 소음은 물론 텔레비전도 너무 크게 켜거나, 고함을 지르거나, 고함소리를 듣지 않는 것이 좋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도 해야될 일이라면 미루지 말고, 조금씩 조금씩 나누어서 해 나가라. 일을 미루는 것은 스트레스를 늘이는 일이 될 뿐이다.

건강생활에 유의하라. 일반적인 3대 원칙은 적당한 수면, 균형 잡힌 음식, 규칙적인 운동이다.

기분이 나쁠 때,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열등의식에 빠졌을 때, 그것을 분출할 수 있는 출구를 만들어라. 남과 싸우는 것도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제일 나쁜 방법이고 운동이나 취미 혹은 가슴을 털어놓을 수 있는 이웃을 가져라. 생활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신앙생활은 가장 건전한 스트레스의 해소 방법이다.

가정을 여관이나 식당으로 만들지 말고 작은 천국으로 만들어라. 가정에서는 최대한 편하게 지내라. 헐렁한 옷을 입고 헐렁한 마음을 가져라.

인격과 능력을 키워라. 큰 인격은 작은 일들에 요동하지 않는다. 똑같은 일도 어떤 사람에게는 스트레스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아무 일도 아니다. 그러므로 인격과 능력을 키우는 일이 스트레스를 근본적으로 줄이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 스트레스는 받지 않는 범위 내에서 공부하라.

 

심는대로 거둔다

 

 

미국에 사는 우리 교포들이 얼굴을 들고 다니기 부끄러운 일이 생겼다. 뉴욕시의 경찰국이 94년 1월부터 최근까지 2천 2백 31명의 윤락여성을 체포했는데, 그 중 700여명, 전체 창녀의 약 3분의 1이 한국여성이었다고 한다. 그 중에는 최근 아이 엠 에프로 인하여 납부금을 조달하기 위한 유학생 창녀까지 있었다는 것이며, 중국여자, 필리핀, 베트남, 말레시아 등 동양여성이 주로 많아서 동양여성들의 이미지가 안좋다는 것이다.

 

매춘의 이유를 흔히 가난에 두지만, 사실은 도덕심의 저하가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지금보다 훨씬 가난했지만 창녀가 많지 않았고 혼외정사 같은 일도 거의 없었다. 옛날에는 그런 일들을 영화에서나 보았지만 지금은 그런 일들을 주위에서 흔히 보게 되는 세상이 되었다.

 

요즘 온 세상은 미국 대통령 클린턴의 섹스 스캔들로 인하여 성 개방의 풍조가 한층 더 만연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성 개방 면에서 세계 첨단을 달리는 스웨덴의 경우 결혼 전에 성 경험을 해 본 일이 없는 총각이 2%, 여자는 15%뿐이라고 한다. 그런데 성 경험이 자유롭다고 해서 즐겁고 행복하냐고 하면 정반대이다. 스웨덴 청년들의 개방은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병든 세상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도덕의 타락은 물론 성적인 면에서만이 아니다. 아침에 신문을 펴면 하루 한 번씩 한탄해야 할 일들이 생긴다. 돈을 위해서 자식의 손가락을 자른 아버지, 어머니를 죽인 딸, 이러한 존속에 대한 범죄는 어느 시대이건간에 도덕의 마지노선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경계였다. 그리고 그 경계가 무너져 내린 사회는 또한 반드시 무너져 내리고 말았던 것이 역사의 교훈이었다.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시대는 도덕심을 찾기 어려운 시대로 달려가고 있다.

 

열매는 심는대로 거두게 되어 있다.

 

나쁜 습관을 심고 좋은 인격을 거둘 수가 없다. 무절제한 생활을 하면서 건강을 거둘 수가 없다. 게으름을 심고 책임 있는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 꾀와 거짓을 심고 사랑과 존경을 거둘 수 없다. 욕심과 미움을 심고 우정과 평화를 거둘 수 없다.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행복을 거둘 수 없다.

 

사람은 심는대로 거두게 되어 있다.

개인이나 단체나 사회나 나쁜 열매를 보았다면, 반드시 그럴만한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열매는 갑자기 열리지 않는다. 씨앗이 오랜 세월 속에서 현실로 나타나는 것이 열매인 것이다.

 

도덕 같은 것은 매스컴에서 광고한다고 갑자기 좋아지지 않는다. 어려서부터 가정교육, 신앙교육, 사회분위기 등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열매가 도덕이다. 유명한 정신의학자인 매닝거 박사는 "사람의 행위를 심리학적으로만 다룰 수 없다. 뿌리는 더 깊은데 그 뿌리가 죄다."라고 했다. 그는 사람의 행위를 조절하는 데에는 심리학적인 문제보다도 신앙적인 문제가 더 큰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충 고

 

 

영국의 의학자이며 선교자였던 스코필드 박사는 한국에 와서 많은 일들을 했다.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세웠고 수많은 교회를 세웠으며 3․1 운동 때에는 이 운동에 적극 협력하면서 세계에 우리나라의 사정을 알렸다. 그래서 결국 그는 일제에 의하여 강제추방을 당했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1958년 정부수립 10주년 경축행사에 국빈으로 초청했다.

 

경무대에 들어간 스코필드 박사는 외국에서 신문이나 방공을 통해 들은 이 박사에 대한 소문이 사실이냐고 묻자 이승만 대통령은 당장 얼굴 색이 변하면서 화를 내서 더 이상 대화를 나눌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 박사는 남의 충고를 몹시 듣기 싫어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말년이 비참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김영삼 대통령도 남의 충고를 듣기 싫어한다고 하는데, 그가 부정부패를 하지 않았지만 그 충고를 듣기 싫어함으로 인하여 결말이 비참하다.

 

미국의 남북전쟁 때에 그랜트 장군은 전황이 좋지 못할 때는 늘 술을 마시고는 주정을 했다. 그의 참모인 로린스 소령은 그랜트에게 찾아가서 직언을 했다. 부하 장교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고, 다른 병사들도 장군을 따라 술을 마시니 절제해 달라는 것이었다.

 

충고를 들은 그랜트는 처음에는 자존심이 상했지만 곧 마음을 고쳐먹고 그 이후로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 후 전쟁이 끝나고 몇 해가 지난 뒤에 강철왕 카네기가 뉴욕에서 그랜트 부부와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 때 카네기가 그랜트에게 좋은 술을 권했는데 그랜트는 10년 전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의 부하의 충고가 지금도 귀에 선하다고 술잔을 거절했다. 카네기는 그의 자서전에 이 그랜트 장군의 이야기를 감명 있게 기록하고 있다.

 

사람이 그릇이 크고 자신감이 있을수록 남의 충고를 잘 듣고, 그릇이 작고 열등감이 많을수록 남의 충고를 기분 나빠한다. 또한 진실한 사람일수록 남의 충고를 듣고, 뭔가 구린 것이 있는 사람일수록 남의 충고를 싫어한다. 그런데 그 차이가 말년의 성공과 실패의 차이로 나타난다.

 

충고는 쓴 약과 같다. 너무 많으면 좋지 않을지 모르지만, 아픈 곳을 고치는 데에는 적당한 쓴 약이 반드시 필요한 것처럼, 사람의 인격이나 일을 바르게 고치는 데는 충고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공자도 "약이 비록 입에는 쓰지만 병을 다스리고 충언이 비록 귀에 거슬리지만 인생을 다스린다." 고 했다. 성경도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도 낫다." (잠언 27:5)고 말하고 있다.

 

목사는 참으로 충고를 듣기 어려운 직업이라고 할 수가 있다. 늘 사람들에게 말을 하는 편이지 듣는 경우는 적기에 자연 충고도 들을 기회가 많지 않고, 또 목사라는 자리가 관습상 충고를 듣기에 익숙한 자리가 아니다.

 

그래서도 그렇고 내 그릇이 작기도 해서 나 역시 충고를 들으면 마음이 편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한 말을 또 한다."든지 "계획성이 없다."라든지 "인정에 끌려 일을 그르친다."든지 "성격이 급하다."는 등의 충고를 가끔 듣는 편이다. 이런 말을 들을 때는 열등감이 들기도 하지만 돌아서서는 고민도 하고 고치려고 노력도 하는 편이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 어떤 사람으로부터 "성격을 급하게 쓰지 말라. 건강에 주의하라. 그러면 큰 대문을 열어놓고 쌀가마를 나누어주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충고를 받았었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나는 성격을 급하게 쓰는 편이며, 건강을 주의하지 않고 사는 편이다. 사람이 이렇게 완고하고 어리석은 것이다.

 

요즘 나는 한달 째 어깨가 아파서 고통하면서야 커피를 절제하고 있다. 사람의 충고를 듣지 않으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충고하고 계신 것이다.

 

 

적재 한계선

 

 

장자(莊子)가 하루는 활을 가지고 사냥을 하러 나갔다. 그때 숲 속에서 까치 한 마리를 발견했다. 장자가 활을 겨냥해서 까치를 쏘려는데도, 까치는 정신없이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만히 보니 까치는 제 앞에 앉아 있는 왕거미를 잡아먹으려고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또 거미는 까치가 자기를 노리는 줄도 모르고 그 위의 나뭇가지에 붙어있는 매미를 잡아먹으려고 열심히 노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광경을 본 장자는 흠칫 자기의 뒤를 돌아다보았다. 탐욕의 뒤에는 계속해서 위험의 사슬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자는 쏘려던 활을 내리고는 그냥 집으로 돌아와서 석달 동안이나 문밖 출입을 않고, 사냥에서 생겼던 일을 생각했다고 한다.

 

세상의 모든 것은 탐욕에 빠져 있을 때에 위험이 가까이 있다. 특별히 사람에게는 탐욕스러운 것의 뒤에는 그 자신의 인격을 저울질하는 함정이 있게 마련이다.

 

요즘 우리는 또 정치권의 사정바람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국세청장이 기업들을 협박하여 검은 돈을 거둬들였다는 것이다. 그 사람들은 탐욕에 몰두하다 자기들의 뒤에 있는 탐욕의 사슬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장자처럼 탐욕이 주위에 있을 때는 자기의 뒤를 돌아다보는 지혜가 있었다면 그런 일들을 당하지 않았으리라. 그래서 성경은 욕심이 죽음을 낳는다고 하지 않았는가!

 

19세기 영국이 5대양을 누빌 때 영국의 많은 배들이 침몰하는 일들이 있었다. 이유는 배에 짐을 너무 많이 실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사무엘 푸림졸이라는 사람이 이 사고 원인과 대책을 조사 연구해서 입법을 했다. 로드라인(Lord Line)이라는 적재 한계선을 규정하는 법인데, 배에다 물 속으로 가라앉는 한계선을 긋고 배가 짐을 실을 때, 그 한계선 밑으로 가라앉을 만큼만 싣도록 했다. 그 후부터는 침몰사고가 적어졌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 로드라인, 적재 한계선을 생명선이라고 부른다. 한계선을 넘어 욕심껏 싣다가는 생명을 빼앗기기 때문이다.

 

재미있게도 로드(Lord)라는 말은 적재라는 뜻도 있지만, "주님"이라는 뜻도 있다. 우리 믿는 사람들도 이 로드라인이 있어야 한다. 주님이 허락하시는 선을 긋고 살아야만 내 신앙이 침몰하지 않는다. 욕심껏 세상일을 하면서 주님을 섬긴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시간에도 물질에도 마음을 쓰는 데도 이 로드라인이 있어야 한다.

 

사람에게 욕심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욕심을 타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의에 의해서 조절하지 못하는 사람은 늘 위험에 빠져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이 없다. 탐욕에 사로잡힌 사람은 위험할 뿐만 아니라, 실은 언제나 가난한 사람이기도 하다. 탐욕과 행복은 한번도 얼굴을 마주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바하(John Sebastian Baha)는 작곡이 끝나면 오선지 위에 SDG(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께 영광을)이라고 적어 넣었다.

 

자기의 일, 자기의 성취, 자기의 가쁨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데 있음을 확인하는 의미에서였다. 성경 66권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무슨 내용이 될 것인가? 그것은 마가복음 12장 30절에서 31절의 말씀이다."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 말씀은 구약에 열 번, 신약에 네 번, 모두 열네 번이나 반복된 말씀이다.

 

결혼할 때 신랑과 신부가 서약을 하는데,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가난할 때나 부할 때나, 높을 때나 낮을 모든 때에도 당신만을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다."라는 서약을 한다. 환경에 영향받지 아니하고 조건여하를 막론하고 오직 당신만을 생각하고 사랑하겠다는 이 언약만큼 아름답고 행복하게 하고 영광이 되는 말이 어디 있을까. 믿음 생활을 한다는 것,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 있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 언약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활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인생의 여러 경우에 고통스러운 선택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다. 내가 죽는 아픔이 없이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헌신하지 못하고 어설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4대 이유가 있다. 그 제1위는 "먹고살기 바빠서"이다. 그러나 그 중의 99%는 정말 먹고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벌기 위해서라고 해야 한다. 두 번째 이유는 결혼이나 모임 같은 세상의 끈들이다. 이 세상과 연결된 끈들이 잡아당기는 대로 다 따라가다 보면 하나님과는 점점 멀어지고 사실은 지옥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셋째는 "쉬어야하니까"라는 핑계다. 네 번째는 주위의 핍박이나 자식들 같은 여러 핑계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은 이런 모든 이유들을 우선 순위에 놓고 남은 정성, 남은 물질, 남은 힘을 하나님께 배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을 삶의 제일 우선 순위에 놓은 것이어야 한다.

 

베르디(Giuseppe Verdi)의 오페라 첫 작품이 플로렌스에서 공연이 될 때, 그는 연주장 한 구석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은 당시 유명한 작곡가 롯시니(Rossini)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베르디에게 청중들의 박수나 감탄하는 소리나 표정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오직 저 위대한 작곡가 롯시니의 표정에 어떤 반응이 있나만을 볼뿐이었다.

 

그의 얼굴에 만족한 미소가 한순간만이라도 스쳐 지나가는가? 실망의 빛이 보이는가? 이것만이 베르디의 유일한 관심이었다.

 

그래서 그는 구석에 몸을 숨기고 롯시니만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던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미소,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미소, 오직 그것만이 문제이다. 하나님만이 기뻐하시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면 모든 문이 열리게 되어 있다. 그래서 청중들의 환호나 박수보다도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크리스천의 삶이고 Soli Deo Gloria다. 이렇게 하나님께 기쁨의 초점을 맞추고 사는 사람에게는 다른 것은 별로 큰 문제가 안된다.

 

「1945년 4월 8일 주일 아침 본 훼퍼(Dietrich Bonhoeffer) 목사님이 기도를 막 마치자 건장한 사나이 둘이 감방 문을 따고 소리쳤다. "4003번 본 훼퍼! 따라와!" 험상궂게 생긴 사나이들은 목사님을 묶었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 울먹이며 목사님께 소리쳤다. "목사님, 목사님 안녕히 가십시오." 그때 목사님이 뒤돌아보면서 아주 평온하고 미소까지 띤 얼굴로 우리들에게 말했다. "마지막이 아닙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다시 만납니다." 그리고는 목사님은 그들 사이에 끼어서 사라졌다.」

 

이것은 나치 독일에 순교 당한 본 훼퍼 목사의 최후의 모습을 기록한 같은 감옥에 있었던 영국장교의 글이다. 진실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의 삶이다.

 

본 훼퍼 목사는 아플 때나 낮을 때나 구애 없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켜 하나님을 기쁘게 한 참된 크리스천이었던 것이다.

 

어는 시인이 이렇게 읊조렸다.

 

나는 피리입니다.

 

오직 당신의 숨결에 따라서만

 

소리내는 나는 당신의 피리입니다.

 

 

 

 

내가 존경하는 사람

 

 

 

 

 

세상에서 성경 다음으로 인용된다는 이솝우화의 저자 이솝이라는 사람은 안짱다리에 발까지 절룩거렸다. 거기다가 불룩 나온 배를 지닌 곱추요, 검은 피부에 얼굴 또한 천하에 짝을 구하기 어려운 추남이었다. 위고의 소설 "노틀담의 곱추"에 나오는 카지모도보다도 한술 더 뜨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사람의 값은 외모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에 사람들은 그를 현인이라 부르고 그의 우화들은 성경 다음으로 세상에 교훈과 이야기 거리들을 던져 주고 있다.

 

이 이솝의 소싯적 일이다. 공중목욕탕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있는지 알아오라고 선생님이 이솝에게 심부름을 보냈다. 다녀온 그는 선생님에게 보고하기를 목욕탕에는 사람이 단 한 사람만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선생님은 전체 생도들을 거느리고 목욕탕으로 갔는데 웬걸 거기에는 입추의 여지조차 없이 많은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선생은 이솝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다그친다. 그러자 이솝이 대답한 사연은 이렇다.

 

"제가 심부름을 왔을 때 목욕탕 정문에 큼지막한 돌멩이 하나가 놓여 있어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돌에 걸려서 넘어지거나 아니면 심하게 채여서 발에 피를 흘리곤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돌을 보고 상스러운 욕을 해댔지 누구 하나 그 돌을 치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계속 넘어지고 계속 발부리에 채이고 계속 욕만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상당한 시간이 되어서야 어떤 사내 한 사람이 그 돌에 채여 피를 흘리고는 욕을 대신하여 그 돌을 낑낑거리면서 굴려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목욕탕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넘어지거나 피를 흘리거나 욕을 흘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에 사람이 사람값을 해야 사람이라고 했으니, 제가 보기에는 사람값을 한 사람이 돌을 치운 그 사람뿐이었습니다."

 

어쩌면 이솝은 자기의 못난 외모 때문에 사물의 진면목을 이해하는 지혜가 일찍이 열렸던 것 같다.

 

스위스의 어느 공원, 허름한 옷차림의 한 사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무엇인가를 주어서 호주머니에 넣곤 했다. 수상하다고 생각한 사람의 신고로 사내는 경찰에 연행되어 주머니에 있는 것을 꺼내 놓으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런데 그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사금파리, 구부러진 못, 유리조각, 예리한 쇠붙이 등이었다. 예상치도 않은 것들이 나오자 경찰이 물었다. 이것들을 왜 주었는가? 라고. 그러자 사내가 대답했다. "어린아이들이 맨발로 뛰어 놀고 있지 않습니까?" 페스탈로치의 일화이다.

 

내가 서울에서 전도사로 시무하고 있을 때였다. 목사님은 몇몇 장로님들로부터 반대를 받고 계셨다. 어떤 장로님은 목사님의 허물을 인쇄까지 해서 교회에 돌리고 목사님의 추방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 목사님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감해진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목사님과 함께 심방을 다니고 있었는데 목사님은 길가에 떨어진 유리조각을 주어서 가방에 넣곤 하셨다. 그때에 나는 큰 감동을 받았다. 사실 목사님은 명절이 되면 나를 불러서 가만한 성도들의 집에 과일을 전달해 주시곤 하는, 남이 잘 모르는 인격을 지니고 계셨던 것이다. 왜 목사라고 부족한 점이 없겠는가? 그러나 나는 다시 그 목사님을 존경하고 따르게 되었다.

 

실은 우리 교회 안에도 내가 존경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내가 사람을 존경하고 감동을 받는 이유는 사람의 뛰어난 능력이나 우월한 지위 때문이 아니라, 지극히 작고 인간적인 것 때문이다.

 

나는 남편이 직장을 잃어 경제적인 어려움이 말이 아닌데도 늘 웃음을 잃지 않고 남편을 존대하고 사는 어느 여집사님을 존경한다. 남편을 예수 믿게 해달라고 새벽기도 때 남편의 신발을 신고 와서는 이 신발의 주인도 이렇게 여기 나오게 해달라고 눈물지으며 기도하는 분을 존경한다. 또 병약하고 못난 아내를 끔찍이도 사랑하며 돌보는 남자 집사님의 커다란 마음을 보면 고개가 숙여진다.

 

세상에 사람이 없다고 한탄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만은 않다. 우리 온누리에는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사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만나는 기쁨과 또한 그 사람들로부터 받는 도전으로 오늘도 지치지 않고 뛰어가는 것 같다.

 

 

사랑도 연필로 써라

 

 

 

 

미국의 프로 축구 경기에서는 TV로 판정하는 재생 심사를 없애기로 했다고 한다. 그 동안 심판의 오심이라고 생각되는 장면을 즉석에서 재생시켜 정확한 판정을 내리는 제도가 TV 판정 제도였다. 그런데 왜 이 정확한 판정제도를 없애기로 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심판의 인격과 양심을 믿고 또 나아가서 게임을 너무나 살벌한 기계에 의지하여 인간미를 사라지게 하지 말자는 취지였다. 한때는 야구에서도 "스트라이크냐, 볼이냐?"도 주심을 로봇을 세워서 전류로 정확하게 판정하자는 의견까지 나왔지만, 이 역시 야구의 맛이 떨어진다는 뜻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옳은 태도다. 사람들이 공놀이하는 것을 기계가 판정한다는 것은 게임(놀이)이라기 보다는 도박이나 싸움에 가까운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운동경기에서 실수를 보는 것은 인간미가 나는 재미있는 일이다. 모든 것이 예측된대로 된다면 그것은 기계에게 게임을 시켜놓은 것과 같은 메커니즘을 즐기는 것뿐이다. 그러나 인간이 게임을 하면 그 능력뿐만 아니라, 감정과 여러 가지 인간적인 여건이 개입되어서 더욱 재미있고 흥미가 더한 것이다. 심판의 판정에 대해서도 약간의 견해가 달라서 경기 도중 마찰이 있는 것도 실은 재미있는 일이다. 야구 경기에서 배트가 부러져서 오히려 안타가 나오는 경우를 보는데, 이는 사람 사는 일들 속에 실수가 일으키는 대표적인 재미라고 할 수도 있다.

 

사람은 실수가 있기에 사람답다. 가끔 실수가 있는 사람이 구수하고, 완전주의자나 좁쌀 만한 문제를 가지고 정의로운양 꼬치꼬치 캐는 사람들은 인사는 하고 지내도 사귀고 싶은 생각은 안 든다. 실수나 실패는 나쁜 것이 아니다. 누구나 바른 판단을 하는 성숙함에 도달하려면 잘못된 판단을 하는 여러 번의 실패를 경험하여야 한다.

 

나는 사람을 잘못 판단한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이번에도 어떤 사람의 사정을 들어주다가 크게 손해날 처지에 놓여 있어 고민하고 있는 일이 있다. 그러나 나는 크게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나의 판단을 정확성에 두기보다는 인간의 사랑과 신뢰에 두고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잘못 판단하고 살아가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런 나를 나쁘게 판단하지 않고 나를 믿어주고 도와주기 때문이다.

 

야구에서 강타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스트라이크 아웃도 많이 당하는 사람들이다. 홈런 타자치고 타율이 높은 선수가 없다. 베이브루스는 세계 야구계에 신화적인 존재인데, 714개의 홈런을 날렸지만 스트라이크 아웃도 1,330회나 당했다. 성공은 항상 실패가 있기에 성공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목사이기에 많은 사람들의 삶의 성공과 실패를 보았는데, 크게 성공한 사람들은 반드시 아프고 큰 실패의 채찍을 맞은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일의 실패와 사람의 결점을 싫어하지 말자.

 

실패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실은 성공도 두려워하는 사람이고, 결점 없는 사람만 찾는 사람은 외톨이가 되고 말 것이다.

 

사랑은 연필로 써라라는 유행가 가사가 있는데 의미가 있는 말이다.

 

완전한 사람들도 지우개가 달린 연필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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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48 하나님이 가르쳐준 성공 홍목사 2024-04-08 9
347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 홍목사 2023-12-13 12
346 가장 후회하는 것 홍목사 2023-08-17 25
345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심정 5단계 홍목사 2023-06-29 31
344 지우개 홍목사 2023-06-14 8
343 저에게는 희망이 필요합니다 홍목사 2022-12-29 22
342 방심 유혹 홍목사 2022-08-17 54
341 온전한 헌신 홍목사 2022-07-30 16
340 밴드 오브 브라더스 홍목사 2022-07-27 20
339 죽은 잎사귀의 반전 홍목사 2022-05-27 19
338 내려놓음 홍목사 2022-05-27 18
337 인내 홍목사 2022-02-18 26
336 은사 홍목사 2021-12-06 36
335 땡큐 테라피 홍목사 2021-11-20 49
334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 관찰하기 홍목사 2021-09-25 47
» 살아있는 것만도 은혜입니다 홍목사 2021-09-11 45
332 부족함도 은혜이다 홍목사 2021-09-08 16
331 벽이 있는 까닭? 홍목사 2021-09-04 14
330 좀 더 넓은 생각으로 홍목사 2021-08-30 22
329 태도가 삶의 내용을 결정합니다 홍목사 2021-05-22 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