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동영상

십자가에서 숨지신 예수님[막 15장 33~41]

 

본문은 인류의 구원의 문을 여는 역사상 가장 큰 사건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약 6시간 동안 십자가 위에서 고난당하시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라는 최후의 말씀과 함께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사랑을 다시 한번 깨닫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첫째,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줍니다.

 

33절입니다. "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 본문 앞 25절을 보면, 예수님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유대인의 제삼시는 우리 식으로 하면 오전 아홉 시입니다. 그로부터 세 시간이 지난 제육시가 되었을 때입니다. 우리 식으로는 한낮인 정오가 되었을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있던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갑자기 온 땅에 어둠이 임했습니다.

 

눅 23장 44절 말씀을 보면, 이 때 온 땅에 어둠이 임한 원인을 밝히고 있습니다.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 특히 정오부터 3시까지는 태양이 가장 뜨겁고 그 빛이 가장 환한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했다'는 사실은 이것이 초자연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늘에 떠 있는 해가 빛을 잃었기 때문에, 이 때 온 땅에 어둠이 임했던 것입니다. 낮 열두 시부터 오후 세 시까지, 하나님은 무려 세 시간 동안 해가 빛을 잃게 하셨습니다.

 

왜 이 때 하나님은 온 땅에 어둠이 임하게 하셨습니까? 이 어두움이 의미하는 바는 두 가지 정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우주적인 슬픔입니다. 또 하나는 종말에 임할 세상의 심판을 암시합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날에 내가 해를 대낮에 지게 하여 백주에 땅을 캄캄하게 하며"라는 아모스 8장 9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주님의 심판 날에 임할 현상에 대한 예언입니다.

 

성경에서 빛은 구원과 관련하여 자주 사용됩니다. 시 27편 1절에서 다윗은 이와 같이 노래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라는 말씀처럼 빛은 하나님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성경에서 어둠은 종종 하나님의 심판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애굽에 내리신 열 가지 재앙 가운데 아홉째는 흑암이 애굽 온 땅에 임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거듭 말씀하시기를, 심판을 받은 자들은 바깥 어두운 데 내어 쫓긴다고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때의 어둠도 하나님의 심판을 뜻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죄악을 아들 예수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그리고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담당하신 예수님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예수님이 십자가의 질고를 당하게 하셨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담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심판하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담당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심판하셨습니다. 이에 대한 표시로, 하나님은 온 땅에 어둠이 임하게 하셨습니다. 벧전 2장 24절 말씀입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34절입니다.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제구시에는 우리 식으로는 오후 세 시를 말합니다. 오전 아홉 시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오후 세 시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숨지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여섯 시간 동안 온갖 고통과 질고를 겪으셨습니다. 처음 세 시간, 곧 오전 아홉 시부터 낮 열두 시까지는 해가 환하게 비추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일곱 마디를 말씀하셨는데, 이 시간 동안 세 번 말씀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먼저 예수님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과 멸시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눅 23장 34절에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그 후 예수님은 눅 23장 43절에 보면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 중 회개한 한 사람에게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어 예수님은 요 19장 26, 27절 말씀을 보면, 요한을 마리아에게, 마리아를 요한에게 부탁하시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 보라, 네 어머니라."

 

나중 세 시간, 곧 낮 열두 시부터 오후 세 시까지는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했습니다. 이 세 시간 동안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침묵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 기간 동안 예수님은 온 인류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가운데 오후 세 시가 되었습니다. 이 때 본문 34절 말씀처럼, 예수님은 크게 소리 지르시며 네 번째로 말씀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는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아람어를 그대로 음역해서 기록한 말씀입니다.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향하여 등을 돌리셨습니다.

 

이 말씀은 시 22편 1절에 예언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시 22편 1절 말씀을 인용해서 크게 소리 지르셨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시편 기자는 이어 시 22편 3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죄를 차마 보지 못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가 되셨습니다. 이에 거룩하신 하나님은 비록 일시적이긴 하지만 예수님에게 등을 돌리시며, 예수님을 버리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결정적으로 예수님이 고통당하고 있는 그 순간, 하나님께서 이 십자가의 자리에서 침묵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삶 속에 늘 동행하시던 하나님의 능력이 이 마지막 순간에 나타나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때 부르짖었던 예수님의 외침이 이것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예수님의 이 절규는 자신의 죄가 아니라 온 인류가 범한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는 고통의 궁극적 깊이를 나타내 주는 말입니다. 이처럼 죄로 인한 하나님과의 단절을 겪음으로써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을 다시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까지 한 번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부르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부의 아들 성자로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러 왔으나, 여기서는 온 세상의 죄인을 대표하는 의미에서 공적인 명칭인 '하나님'으로 불렀습니다. 이 시간은 죄인의 대표로 심판받으시는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냥 '하나님'이라 부르지 않고,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하나님께서 저를 버리실지라도, 하나님께서 저 죽음 속에 내버려 두실지라도 저는 하나님을 신뢰하겠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저의 것이고 저는 하나님께 속한 자입니다. 저는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겠나이다" 하는 신앙 고백입니다. 애정과 신뢰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나를 향하여(외면하여?) 얼굴을 돌리시는 하나님을 향해 '나의 하나님'이라고 외치는 그 속에 기도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하나님을 향한 깊은 믿음이 들어있다는 말씀입니다.

 

35절입니다. "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초자연적인 어두움을 직접 눈으로 보고서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예수님을 조롱하는 이들의 무지함과 어리석음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말한 '엘리'(나의 하나님)를 엘리야를 부르는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이들이 '엘리야'를 부른다고 생각한 까닭은 엘리야가 메시아보다 먼저 와서 유대인들에게 메시야를 소개할뿐더러 메시아와 동시대에 살면서 메시아를 증거할 것이라는 유대인의 신앙 때문입니다.

 

말 4장 5절에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올 것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런 뜻으로 희롱한 것입니다. "지금 그가 엘리야를 불러서, 자기를 그리스도라고 증언해주기를 바라는 모양이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자기가 그리스도인 줄 알다니. 쯧쯧."

 

바로 이 때 요 19장 28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다섯 번째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이 때 예수님은 "내가 목마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시 69편 21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 앞서 23절에 보면, 빌라도의 군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전, 예수님에게 일종의 마취제라고 할 수 있는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그것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온전하게 받기를 바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은 시 69편 21절에서 다윗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예언한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하사, "내가 목마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셨습니다. 36절입니다.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고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이 때의 한 사람은 빌라도의 군인이었을 것입니다. 마 27장 36절 말씀을 보면, 빌라도의 군인들이 그 자리에 앉아서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해면'은 바다에 사는 해면동물의 섬유 조직입니다. 오늘날의 스펀지와 같이, 물기를 빨아들여 그 안에 간직합니다. '신 포도주'는 마취성 약술이 아니라, 물이 귀한 팔레스틴에서 물의 대용으로 마시는 신 포도주에 계란과 물을 많이 섞어 만든 로마 병사들이 일상적인 음료로 마시던 것입니다.

 

그들은 '과연 엘리야가 와서,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려 주는지 두고 보자' 하고 조롱조로 말했습니다. 마 27장 49절 말씀을 보면, 이 때 그 남은 사람들도 똑같은 말을 하면서 다함께 예수님을 희롱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들을 대신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바로 그들을 위하여 예수님은 하나님의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37절입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여섯 번째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 19장 30절에 보면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의 버림을 받으심으로,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한 모든 사역을 다 이루셨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큰 소리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일곱 번째 말씀은 눅 23장 46절에 나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잔을 다 마시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금 회복되었음을 아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큰 소리로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외치셨습니다. 그런 후 예수님은 숨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행하신 말씀은 시 31편 5절에 기록된 말씀의 인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심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계획한 구원을 완성시키기 위해 완전한 인간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최종적인 단계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셔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자발적인 헌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마지막 말씀은 바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자기 희생을 하셨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요 10장 17, 18 말씀입니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때는 제구시 곧 오후 세 시였습니다. 바로 이때부터 성전에서는 수많은 유월절 양들이 죽임을 당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그 시각을 맞추어,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자기 목숨을 스스로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유월절 양이셨기 때문입니다. 요 15장 13절에서 예수님은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로되,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스스로 버리셨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세상의 어느 누가 예수님보다 더 큰 아픔을 가질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하나님과 단절되어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신 그분 때문에 우리가 살아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숨지시자 성소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38절입니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38절은 '이에'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앞 절과 연결시켜 주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자, 곧이어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는 뜻입니다.

 

출 26장 33절 말씀을 보면,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휘장이 있었습니다. 휘장 바깥쪽을 성소라고 불렀고, 휘장 안쪽을 지성소라고 불렀습니다. 휘장 안쪽인 지성소는 말 그대로 지극히 거룩한 곳이었습니다. 그 곳에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증거궤와 뚜껑인 시은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곳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단지 대제사장만 일 년에 단 한 차례 곧 속죄일에만 지성소에 들어갔습니다. 그것도 속죄제로 잡은 짐승의 피를 증거궤 위, 곧 속죄소의 위와 앞에 뿌리고 얼른 나와야 했습니다. 이 외에 지성소에 들어가면, 누구나 다 죽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지성소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큰 휘장이 지성소 앞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성소 휘장입니다. 그러니까 성소 휘장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가 단절된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지시자, 바로 그 때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그것도 어느 한 쪽 귀퉁이가 찢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서 둘이 되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완전히 찢어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보다 몇 십 년 뒤에 태어난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성소 휘장의 크기는 길이가 약 30m, 폭 2m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 휘장은 24가닥의 실로 엮은 끈 82개로 정교히 짜여져서 그 두께가 손바닥 두께만큼 되었기 때문에 위에서 아래로 순식간에 찢어진다는 것은 이적 중의 이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때 성소의 휘장을 찢으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이는 참으로 의미심장한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혔던 그 담장이 무너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우리의 대속물로 주셨습니다. 그리함으로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 값을 남김없이 지불하셨습니다. 롬 3장 24절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히 4장 16절 말씀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속량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사실을 확증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성소의 휘장을 완전히 찢어버리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그 누구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해의 상징이 되셨습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모든 종교적 차별, 사회적 차별,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차별, 남자와 여자의 차별, 얼굴 색깔로 인한 인종적 차별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극복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보여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용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의 연약함이 치유를 받았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생명을 얻었습니다.

 

셋째, 십자가 밑의 사람들

 

39절입니다.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여기에 백부장이 등장합니다. 말 그대로 그는 백 명의 부하를 이끄는 로마 군대의 지휘관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형을 집행하는 책임자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말씀처럼, 그는 예수님을 향하여 서 있었습니다. '향하여 섰던'이란 '바라보고 있었던'이란 뜻으로 백부장이 예수님의 죽음에 대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마 27장 54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후 그가 맡은 임무는 예수님을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자연히 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지시는 광경을 자세히 쳐다볼 수 있었습니다.

 

다시 39절 말씀을 보면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백부장은 로마의 직업 군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손으로 수많은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또한 십자가에서 숨진 사람들을 수도 없이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태껏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같이 그렇게 숨지는 사람은 처음 보았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마 27장 54절 말씀은 이와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백부장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고 조롱하는 이들을 위해 용서하시며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강도에게 낙원을 약속하시는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일곱 마디 말씀과 묵묵히 하나님의 뜻에 의연히 죽음을 맞이하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하나님 아들로서의 면모를 발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무려 세 시간 동안이나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지시자, 그 곳에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 지진으로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렸습니다. 그와 같이 심상치 않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님을 지키던 자들 곧 그의 부하 군인들은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그 곳에 하나님이 임하셔서 역사하고 계심을 자신들의 피부로 생생하게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합니다. 물론 백부장의 이 고백은 당시 황제, 사제, 군사적 영웅 등을 신의 아들로 부른 것과 같은 정도의 고백 정도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마가는 백부장의 말을 인용해 예수님이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셨음을 증언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자들의 입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고백이 나왔다는 것은 예수님의 무죄하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이 백부장은 후에 신앙을 가지게 되었고 복음을 전파하다가 갑바도기아에서 순교하였다고 전해집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숨지심을 바라보는 여자들이 있었습니다. 40절입니다.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이 이미 주님을 버린 채 달아났고, 그 중 가룟 유다는 스승이신 예수님을 팔아 버리는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죽음의 형장까지 따라옴으로써 버리지 않은 자들이 있었는데 바로 연약한 여인들이었습니다.

 

이 여인들은 의기양양한 유대 관원들과 로마 군병들의 기세에 눌려 그나마 예수님을 멀리 서서 바라보아야만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특별히 마가복음은 그 중에서 세 여자를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비록 멀리 떨어져 있었으나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생생한 증인이요, 목격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병행 구절인즉 눅 23장 49절에는 "예수를 아는 자들과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라고 표현함으로써 이 여자들이 대부분 갈릴리 여자였다는 사실과 당시 이곳에는 여자뿐 아니라 남자도 포함되어 있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알려진 자로는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 즉 '요한'이 있었습니다.

 

마가가 소개하는 첫 번째 여인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막달라 출신의 마리아라는 뜻입니다. 막달라는 갈릴리 호수 서쪽에 위치한 자그마한 해변 마을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공관복음서 모두에 이 여자의 이름이 선두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가장 열성적인 예수님의 여제자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누가복음 8장에 의하면 한때 일곱 귀신들린 적이 있었으나 예수님에 의해 고침을 받고 지속적으로 예수를 봉양하여 왔습니다. 이러한 열성으로 인하여 그녀는 요 20장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보는 영예를 누렸습니다.

 

두 번째 여자는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야고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두 명입니다. 따라서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구별하기 위해,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를 작은 야고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요 19장 25절에는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로 나온 것으로 보아 글로바와 알패오는 동일 인물입니다. 아마 글로바는 알패오란 본명의 별명일 것입니다. 그리고 마 27장 56절에는 '요세'가 '요셉'으로 나와 있으나 이는 전자가 헬라식 표기이고, 후자가 히브리식 표기란 점 외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여자는 살로메입니다. 마 27장 56절에는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로 나와 있고, 요 19장 25절에는 '예수님의 이모'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살로메는 세베대의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며 동시에 예수님의 이모입니다. 그러니까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은 애수님과 이종 사촌간입니다.

 

41절입니다. "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따르며 섬기던 자들이요, 또 이 외에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들도 많이 있었더라." 여기에 이들 여인들이 귀하게 쓰임 받은 내용이 나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갈릴리에 계실 때에 따르며 섬기던 자들이었습니다. 여기 '따르다'와 '섬기다'라는 두 동사의 시제가 모두 미완료형입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동작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끝까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또한, 이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변함없이 섬겼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음을 감사하여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41절을 보면, 이들 외에도 이름 없이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 모친 마리아, 이모,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가 언급되어 있습니다(요 19장 25절). 이것은 예수님의 처형 장소에 실제로 많은 수의 남자와 여인들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 말씀대로, 처음에는 이들이 멀리서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요 19장 25절 말씀과 같이, 나중에는 이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곁까지 다가갔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이들의 애틋한 사랑이 이들의 발걸음을 예수님 앞으로 인도했던 것입니다. 그 후 이들은 예수님의 무덤까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어려운 시기이기도 하지만, 풍성한 결실의 계절인 가을을 보내고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이미 얻은 생명을 풍성하게 누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랑과 은혜를 더욱 체험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풍성하게 맺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을 높이며, 성령님께 기쁨을 드리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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