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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은 축복을 나누라[수 19장 49-51]

조회 수 888 추천 수 0 2015.07.24 19:23:41

받은 축복을 나누라[1949-51]

 

49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경계를 따라서 기업의 땅 나누기를 마치고 자기들 중에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기업을 주었으니 50 곧 여호와의 명령대로 여호수아가 요구한 성읍 에브라임 산지 딤낫 세라를 주매 여호수아가 그 성읍을 건설하고 거기 거주하였더라. 51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의 지파의 족장들이 실로에 있는 회막 문 여호와 앞에서 제비 뽑아 나눈 기업이 이러하니라. 이에 땅 나누는 일을 마쳤더라.

 

제가 시골에서 살 때 어린 시절에 친구들과 함께 즐겁게 놀던 놀이 가운데 땅 뺏기가 있었습니다. 별다른 놀이 기구가 없던 옛날에 가장 재미있던 놀이였습니다. 넓은 마당 양쪽에서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이기는 사람이 힘껏 한 발짝을 뛰어 줄을 긋고 이것이 내 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내 땅을 뺏느라 애를 써서 넓은 땅을 마련해 놓고 한참 기뻐할 때 어머니가 "얘들아, 들어와서 손씻고 저녁 먹어라"하고 부르시면 그렇게 열심히 뺏어 놓은 그 소중한 땅(?)을 다 내버리고 집으로 달려가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오늘 이 세상 사람들은 열심히 땅뺏기를 하고 있습니다. 땅 투기, 아파트, 주식, 예금통장, 고가의 골동품, 하여튼 돈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던지 소유하려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많은 것을 소유합니다. 그러나 저녁에 어머니가 부르시면 지금까지 열심히 따 놓았던 땅을 다 내버리고 저녁 먹으러 집으로 가듯 인생의 황혼에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면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그 많은 것들을 모두 다 내놓고 가는 것입니다. 어느 것 하나 가지고 갈 것이 없습니다.

 

오늘 저는 "받은 축복을 나누라"는 제목으로 인생을 참으로 아름답고 존귀하게 살아가는 비결을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축복 받는 비결을 가르쳐 주시기도 하시지만, 진정으로 지혜로운 인간은 받은 축복을 나누는 비결을 배우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그 정복한 땅을 나누는 이야기가 여호수아 13장부터 길게 기록되어 있는데, 본문은 이제 모든 지파를 향한 기업 분배가 마무리되는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신 이같은 영광과 안식은 그들의 능력과 수고의 열매가 아닙니다.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이루신 하나님의 은혜의 열매입니다. 이 속에 있는 분배의 원리를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주신 땅 분배의 원칙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1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 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8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9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8:1, 7-9)고 말하면서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그들이 정복한 땅은 하나님께서 짧게는 45년 전에, 길게는 야곱이 가나안 땅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갈 때 "너와 네 자손이 이 땅으로 다시 돌아오게 해 주마" 약속하셨던 약속을 475년 만에 이뤄주신 것입니다.

 

"네가 사는 날 동안 아무도 너의 앞길을 가로막지 못할 것이다. 내가 모세와 함께 하였던 것과 같이 너와 함께 하며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 하겠다. 굳세고 용감하여라. 내가 이 백성의 조상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을 이 백성에게 유산으로 물려줄 사람이 바로 너다"(1:5-6)라고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가나안 땅은 자기들의 힘이나 재주나 노력으로 이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것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땅만이 아닙니다. 땅과 함께 그 땅의 모든 좋은 것을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것인데 그것은 그들에게 공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재능이 있어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는 사랑과 약속을 지키시려는 신실하심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어느 하나 내 힘으로나, 내 재주로나, 내 능력으로 이룩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다윗 왕은 평생에 하나님의 성전 건축하는 것이 소원이었지만 하나님께서 허락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성전을 건축할 자재를 전부 준비해 놓고 또 자기가 드릴 수 있는 재산 전부를 봉헌하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 우리 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 길이 길이 찬양을 받아 주십시오! 주님, 위대함과 능력과 영광과 승리와 존귀가 모두 주의 것입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주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나라도 주의 것입니다. 부와 존귀가 주께로부터 나오고, 주께서 만물을 다스리시며,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으시니, 사람이 위대하고 강하게 되는 것도 주의 손에 달렸습니다. 우리 하나님, 우리가 지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찬양합니다. 제가 무엇이며, 저의 백성이 무엇이기에, 우리가 이렇듯이 기쁜 마음으로 바칠 힘을 주셨습니까? 모든 것을 주께서 주셨으므로,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을 주께 바쳤을 뿐입니다." 이렇게 기도를 올린 후에 자기의 아들 솔로몬에게 왕관을 씌워 왕위를 계승시켰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가진 것이 있습니까? 돈이나 재물이나 재산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재능입니까? 그것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세상적인 지위가 있습니까? 그것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아직 여러분과 제가 살아 있습니까? 이것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신 것입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에 언제든지 주님께서 달라 하시면 모두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저녁 먹으러 가는 어린 시절처럼, 모든 것을 놔두고 가야 하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이웃과 더불어 나눠가져야 합니다. 힘들고 어려워하는 이웃과 더불어 나누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축복과 사랑과 약속의 성취로 주신 가나안 땅을 12지파에게 각각 분배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분배의 원칙이 있었습니다. 그 원칙을 살펴보면 대단히 아름답습니다.

 

첫째, 함께 의논했습니다. 제사장 엘르아살, 눈의 아들 여호수아, 각 지파 별 족장들이 함께 모여 의논했습니다. 그때 모든 행정 책임자는 여호수아였습니다. 물론 여호수아가 그 땅을 정복하는 일이나 분배하는 일을 하나님께로부터 위임받았지만, 여호수아는 그 일을 자기 단독으로 처리하지 아니하고 영적 지도자인 제사장 엘르아살, 그리고 각 지파의 대표인 족장들(소위 실무자들)과 함께 의논했습니다.

 

우리들이 직장에서 일할 때나, 가정에서 하는 일이나, 더욱이 교회에서 일할 때, 할 수 있는 대로 여러 사람과 의논하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혼자 결정하고 혼자 추진하는 것이 쉽기도 하고 빠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무슨 일이든 혼자 하는 것보다는 둘이 하는 것이 좋고, 둘이 하는 것보다는 열이, 열이 하는 것보다는 백 명이 함께 하는 것이 좋습니다.

 

둘째, 그 땅을 분배할 때 제비를 뽑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 다음에 그 땅을 지파별로 분배하는 일에 관한 원칙을 여호수아 141-2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우두머리들이 다음과 같이 분배하였다. 주께서 명하신 대로 그들은 제비를 뽑아, 아홉 지파와 둘로 나뉜 반쪽 지파에게 땅을 유산으로 나누어주었다."

 

제비를 뽑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그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차지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었기 때문에, 각 지파의 몫은 하나님이 정하신 바에 따라 분배되어야 했습니다. 뛰어난 지혜로써 모든 일을 공정하게 처리했던 여호수아도 모두 한 민족인 이 많은 지파에게 기업을 분배하는 일을 공정하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오직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의 구원받은 백성으로 여러 기업을 나누어주신 하나님의 권위만이 각 지파에게 어떻게 기업을 나누어 줄 수 있을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이 방법은 이미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방법입니다. 그것이 제비 뽑는 방법이었습니다. 성경에는 제비를 뽑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제비를 뽑는 것은 우연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가 완전히 배제되고,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신앙적 결단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장 지혜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가장 공평하신 결정에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때의 상황을 한번 짐작해 보시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 편에서 보면, 각 지파별로 인구의 숫자가 다릅니다. 사람마다 각각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땅의 형편으로 보면 땅은 평야지대가 있고 산간지대가 있으며 계곡이 있고 해변이 있습니다. 나무와 숲이 있는 옥토가 있는가 하면 돌과 모래가 많은 박토가 있었습니다. 이미 나누어 놓은 땅은, 지형에 따라 조금 넓기도 하고 좁기도 했습니다. 서로 좋은 곳을 차지하고 싶을 것이며 보다 더 많이 차지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비를 뽑는 것은 이 인간의 모든 이기적인 욕망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결정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순종한다는 신앙적 결단인 것입니다. 그것이 혹 인간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공평하심에 전적으로 신뢰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셋째는 이 제비를 뽑은 장소가 하나님의 회막 앞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한다는 깊은 진리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함,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특징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의 삶,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유다 지파는 자기들의 기업을 시므온 지파에 나눠주었습니다.

 

191절에 보면 "둘째로 시므온 곧 시므온 자손의 지파를 위하여 그들의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으니 그들의 기업은 유다 자손의 기업 중에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9절에 보면 "시므온 자손의 이 기업은 유다 자손의 기업 중에서 취하였으니 이는 유다 자손의 분깃이 자기들에게 너무 많으므로 시므온 자손이 자기의 기업을 그들의 기업 중에서 받음이었더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새번역은 "유다 자손의 몫이 필요 이상으로 크기 때문에, 시므온 자손이 그들의 몫을 유다 지파의 유산 가운데서 받은 것이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유다 지파 자손들의 마음 씀씀이를 통해서 인생을 가장 아름답고 숭고하게 사는 길을 발견합니다. 인간의 본성에는 아무리 많이 가졌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더 많이 가지고 싶은 마음이 모든 인간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유다 지파 자손들은 자기들이 받은 땅이 지나치게 넓다는 사실을 알고, 시므온 지파에게 나눠주도록 한 일을 통해서 자기 자신 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도 돌아보는 사랑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보여주는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12:1-3)라고 말씀하심으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셔서 모든 민족의 복의 통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신 이유는 다른 사람을 복되게 하고, 그 받은 축복을 다른 사람과 더불어 나누라고 주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내가 많이 가지는 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기지 않고, 나에게 주신 것, 그것이 비록 많은 것이 아닐지라도 남에게 나눠주는 것을, 나눠줄 줄 아는 넓은 마음과 사랑을 가지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임을 아는 믿음으로 바뀌어야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 우리 기독교는 더 많이 가지는 것만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가르치고, 또 그렇게 알기 때문에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 되도다"(20:35)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의 욕심을 버리고 나에게 축복으로 주신 것을 남과 더불어 나누는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다른 지파들은 다 작든 크든 자신들의 기업을 분배 받았는데, 시므온 지파가 유다 지파에 속한 땅에 거하며 기업을 물려받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찌 보면 다른 지파와 비교해 볼 때 시므온 지파가 불이익을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시므온 지파가 불이익을 당한 부분이 여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49장을 보시면 야곱이 죽으면서 자기 아들들에게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을 합니다. "너는 이런 축복을 받아라, 너는 이런 축복을 받아라." 축복을 하는데 유달리 이 시므온에게는 축복대신 저주를 하고 있습니다. "5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 6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7 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여기 야곱 중에서 나누고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라는 말은 야곱의 후손인 열두 지파 중에서 흩어지고, 그 지파 중에서 소멸되어지는 역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이 야곱의 예언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성취되는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야곱이 창세기 49장에서 자기의 열두 아들을 놓고 축복했던 것처럼, 모세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무려 200만 정도 되는 엄청난 많은 수의 사람을 앞에 놓고 각 지파별로 축복들을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신명기 33장을 보면 다른 지파는 모세가 다 축복을 하면서 시므온 지파는 축복을 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 버립니다. 모세가 시므온 지파를 열두 지파가 축복 받는 그 자리에서 열한 지파는 다 축복을 받았는데 이 시므온 지파는 축복의 대상에서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자녀들을 축복할 때 시므온은 축복이 아닌 저주를 받습니다. 모세가 열 두 지파를 축복할 때 시므온 지파는 축복을 하지 않고 지나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것과 관련해 시므온과 그의 후손들과 관련된 성경을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성경을 연구하다 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사실 네 명의 아내에게서 열두 명의 아들들이 태어났으니 그 아들들이 사이에 갈등이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특별히 레아에게서 태어난 아들들은 자기 어머니가 아버지로부터 사랑 받지 못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요셉이나 베냐민처럼 다른 형제들보다 아버지에게 사랑 받지 못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 많았고 자기가 처해있는 형편과 처지, 가정환경에 대해서도 불만이 많았습니다. 특별히 라헬이 낳은 요셉에 대해서는 굉장한 시기심과 미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이 들판에서 양을 칠 때 자기가 미워하고 시기하던 요셉이 아버지의 심부름을 오게 되었습니다.

 

들판에서 양을 치다가 요셉이 저 멀리서 오는 것을 보고서 형들은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기가 미워했던 배다른 형제를 잡아 죽이자는 것입니다. 죽여서 구덩이에 처넣어 버리자는 겁니다.

 

얼마나 잔인합니까? 이렇게 그들의 마음속에 미움과 분노가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맏아들이었던 르우벤의 말대로 요셉을 죽이지 않고 묶어서 물이 마른 샘 속에 던져 넣었다가, 나중에 유다의 권유로 요셉을 애굽에 팔아버렸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형들이 양식을 위하여 애굽에 갔다가 그 나라의 국무총리가 되어있는 요셉을 만나게 됩니다. 요셉은 그들을 알아 보았지만, 그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요셉은 그들을 정탐꾼으로 몰아붙여서 볼모로 한 사람을 붙잡고 그들을 돌려보내는 내용이 창세기 42장에 나옵니다.

 

그런데 4224절에 보면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끌어내어 그들의 눈 앞에서 결박"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성경학자들은 영악하고 차가운 성품의 소유자인 시므온이 요셉 살해 계획도 주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므온은 레위와 함께 자기 누이 디나가 세김의 추장 아들에게 강간을 당했을 때 세겜 사람들을 속이고 잔인하게 학살을 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49장에 야곱이 죽을 때 시므온과 레위 모두에게 '너희는 영원히 흩어지리라'고 예언했습니다.

 

또한, 출애굽 이후 광야 생활에서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밑에서는 아론이 백성들을 데리고 금송아지 섬기는 일을 획책했습니다. 모세가 돌아왔을 때 하나님의 노가 모세에게 임해서 백성들을 처단해야 했는데, 그때 그 처단하는 일에 나선 지파가 레위 지파입니다. 자기 백성을 처단하는 일에 나서기가 쉽지 않은데 이 때 레위가 나서서, 제사장 지파가 되고 회복이 됐습니다. 비록 레위 지파에게는 기업이 없고, 열두 지파 속에 흩어져서 살게 되었으니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지만 그러나 명예로운 흩어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언을 듣고도 시므온 지파는 광야 생활에서 모압 여인과 음행하도록, 족장부터 성적 방종에 넘어가도록 획책하는 일을 했습니다. 민수기 25장에 보면 바알브올이라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배신하고 이방 여인들과 더불어서 음란하면서 우상숭배를 합니다. 그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 염병이 들어서 하루에 24000명이 죽어 가는데 그 중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므온 지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민수기 2514절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미디안 여자와 함께 죽은 그 이스라엘 남자는, 시므온 가문의 지도자인 살루의 아들 시므리이다(새번역)." 시므온 지파의 지도자였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모세에게 반역을 시도하고 그리고 우상숭배하고 이방여인을 끌어들여서 음란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이렇게 바알브올 우상을 섬기는데 넘어가게 했기 때문에 광야 생활 초기 59,300 명이던 그들이 22,200 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죄로 인해 지도자가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결국 시므온은 유다 지파에 합해져서 나중에는 존재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초라하게 흩어졌습니다. 열두 지파의 한 사람이니까 결국은 구원 받은 지파입니다. 모두 구원받았지만 이 땅에서 초라한 역할도 있고 멋있는 역할도 있습니다.

 

1절에 "그들의 기업은 유다 자손의 기업 중에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조금 심하게 말하자면 유다지파에 더부살이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어떤 모습으로 임하였느냐에 대한 결과입니다.

 

시므온은 주어진 역할에 순종했습니다. 유다 지파의 땅에 들어가는 것에 아무 말 없이 순종했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왜 열두 지파 중에서 나만 땅이 없는 거야, 왜 우리만 유다 지파 밑에 들어가야 하는 거야.' 이러지 않고 '내가 유다 지파의 땅에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주기만 해도 감사하다' 이렇게 된 것입니다.

 

유다도 그들의 땅을 주는데 기꺼이 순종했고, 시므온도 순종을 했습니다. 이런 시므온을 보면서 유다가 많이 가졌다고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유다 지파는 시므온 지파에게 기업을 나눠주면서 불평하지 않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땅은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힘든 시므온을 받아들이는 유다 지파는 아름다운 영성을 가진 지파라고 생각이 듭니다. 바로 그 지파에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똑같은 환경과 제도, 사건 속에서 지냈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들이 어떤 모습과 자세로 임하였느냐에 따라 그들과 후손들의 미래가 달라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들이 시므온 지파의 영성과 삶이 아니라, 유다 지파와 같은 영성과 복된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여호수아가 요구한 땅

 

단 지파에 대한 기업 분배를 끝으로 역사적인 가나안 땅 분배 작업은 완전히 끝을 맺었습니다. 이런 시점에서 이제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딤낫 세라를 기업으로 요구하여 받은 뒤 그 성음을 중건하고 죽을 때까지 그곳에 거합니다.

 

49, 50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49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경계를 따라서 기업의 땅 나누기를 마치고 자기들 중에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기업을 주었으니 50 곧 여호와의 명령대로 여호수아가 요구한 성읍 에브라임 산지 딤낫 세라를 주매 여호수아가 그 성읍을 건설하고 거기 거주하였더라."

 

여호수아의 기업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어떠한 명령을 내리셨는지 성경에는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을 정탐한 12명의 정탐꾼 중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신실했던 점으로 미루어보아 갈렙에게 내린 축복을 여호수아에게도 동일하게 내리셨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 같이 가나안 정복 전쟁에 참여한 갈렙은 가나안에서 가장 먼저 기업을 분배받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이러한 권한이 자기에게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 분배의 소명을 완수하기까지 결코 욕심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일꾼으로서의 이러한 모습은 이스라엘 전체에서 강한 신앙의 모범으로 비추어졌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가 요구한 딤낫 세라는 세겜 서남쪽 27km 지점으로, 이 지역은 불모지대나 다름없는 산간지대였으므로 여호수아 개인의 역할에 대한 대가로는 너무나 보잘 것 없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큰일에 작은 보수로 만족한 사람입니다.

그가 기업을 얻은 다음 그 성읍을 중건하였다는 말씀을 보아 무너지고 황폐한 곳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일에 전념한 그 자체가 여호수아에게는 큰 기쁨이었을 것이며, 하찮은 땅을 분배 받았다고 해서 그 기쁨이 감소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지도자로서 자기의 사리사욕을 채우지 않고, 자신을 희생하고 양보한 모범적 자세라 할 것입니다. 나라의 지도자도, 영적 지도자도 항상 이와 같은 자세로 백성을 위하고 정의를 실현해야 합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주님 안에서 행한 수고에 대해 특권을 요구할 때가 많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종의 자리를 떠나지 않으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기억하며 주님과 교회를 섬기는 특권만으로 자족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자기와 같은 지파인 요셉 지파가 땅을 조금 줬다고 불평했을 때, 여호수아는 '너희 스스로 개척하라'고 처방을 내렸습니다. 이렇게 자기 지파를 객관적으로 보았으며, 자기 자신의 기업도 고향 땅 에브라임 산지의 딤낫 세라를 구한 것입니다.

 

이처럼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로서 위대한 업적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보다는 먼저 백성들을 위해 기업을 분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후에야 비로소 자신을 위해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작은 성읍 하나를 기업으로 요구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백성을 위해 희생하고 양보할 줄 아는 참 지도자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을 모두 다 분배할 때까지 그의 몫을 챙기지 않았습니다. 그저 기업을 얻지 못하는 지파가 없도록 그의 전심을 쏟을 뿐입니다. 그에게는 자기보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내 욕심은 완전히 버린 무욕의 사람이고, 다른 사람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한 인격의 소유자일 뿐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잘 먹고 좋은 옷 입고 좋은 집 쓰고 살아야 잘 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많은 것을 갖고 누려야 성공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 안에서 잘 사는 것은 그런 세상의 기준이 아니고 하나님 안의 성공은 그런 세상의 기준으로는 측량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곧 주님 안의 성공과 잘 사는 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거하는 동안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삶이라야 잘 사는 것이고 성공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생활관의 변화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이 요구되는 진리입니다. 여호수아는 이런 진리의 요구에 귀를 기울였고 그 뜻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러면 그는 어떻게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까?

첫째는 감사의 신앙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만 가나안에 들어올 수 있었다는 것 자체로 만족하고 감사하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이것을 우리의 경우에 도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 같은 죄인이 예수님의 은혜로 용서를 받고 구원 받아 천국백성의 대열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만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평범한 하루하루 속에 하나님의 동행을 의식하며, 그분의 동행에 만족하고 기뻐하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부족을 항상 느끼고 가나안 전쟁과 같은 많은 어려운 고비와 시련에서 구원해 주시고 승리하게 해 주시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몸으로 감사하며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셋째는 형제 사랑의 도를 익힌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잘되는 것보다는 형제가 잘 되는 것을 더 원했고, 형제가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하고 형제가 감격할 때 자신의 일처럼 감격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몫을 챙기는 것보다 형제의 몫을 챙겨주는 것을 낙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참으로 지도자의 도리를 알고 지도자의 처신을 알고 있은 사람입니다.

 

"저녁 먹으러 오라"고 부르시던 어머니의 부르심처럼,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황혼의 때에 어서 오라" 하시면 우리는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고스란히 내 놓고 가야 합니다. 또한 가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도 남김없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받은 축복을 나누라!" 유다 지파처럼, 여호수아처럼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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