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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시대를 향한 진통[출 1장 8-21]

조회 수 87 추천 수 0 2018.09.07 11:58:40

새 시대를 향한 진통[출 1장 8-21]

 

8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 9 그가 그 백성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10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 하고 11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에게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12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가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13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을 엄하게 시켜 14 어려운 노동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일이 모두 엄하였더라. 15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사람과 부아라 하는 사람에게 말하여 16 이르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17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 18 애굽 왕이 산파를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같이 남자 아기들을 살렸느냐?" 19 산파가 바로에게 대답하되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 하매 20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 21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

 

우리 성경에는 출애굽기 서두에 표시되어 있지 않으나 히브리어 원문 성경에는 '그리고(now)'라는 접속사로 출애굽기가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출애굽기는 창세기의 연장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출현은 우연히 되어지거나 혹 자기들의 힘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들의 조상 사이의 자비로운 언약으로 되어졌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야곱의 가족이 어떻게 애굽으로 이주해 왔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죽었던 족장 야곱과 요셉이 어떤 것을 유언으로 남겼는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야곱이나 요셉이나 자신들이 죽거든 가나안 땅에 묻어 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언약을 말할 때 가장 핵심적인 것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땅'이고 다른 하나는 그 땅에서 살게 될 '후손들'에 대한 약속입니다. 그 땅은 가나안입니다.

 

창세기는 시작의 책입니다.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 중에 노아를, 노아의 세 아들 중에 셈을, 셈족 중에서 아브라함을, 아브라함 두 아들 중에 이삭을, 이삭의 쌍둥이 아들 중에 야곱을 선택하시고,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 요셉을 통하여 기근을 예비하게 하시고 야곱 가정을 애굽에 이주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출애굽기는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구속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창세기는 족장 중심으로 가족의 역사가 나타난다면 출애굽기는 민족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율법과 성막을 갖춘 어엿한 신정국가로서 출범하게 된 것은 애굽의 노예 상태로부터 그들을 피로 값주고 이끌어내신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근거합니다. 출애굽기는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스러운 구속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구속 사역을 통하여서 자신을 이스라엘의 구속자로 계시하시고 증언하시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의 요절 말씀은 출애굽기 3장 7-8절 말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 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8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하나님이 보고, 듣고, 아셨다'는 것입니다. 1장 2장의 내용입니다. 백성의 상황을 보고 듣고 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말이 '내가 내려가서'라는 말씀입니다. 이 내용이 3-11장까지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십니까?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애굽으로부터 건져내십니다(12-13장). 그리고 어떻게 하십니까?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애굽에서 광야로 인도하여(14-18), '데려가려 하노라.' 가나안에 데려가십니다(19-40장).

 

창세기 마지막에 기록된 요셉의 시대가 끝이 나고, 400여 년의 지난 후 이제 장정만 60만이 되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가족의 역사가 끝이 나고, 민족의 역사가 시작되는 새로운 세대입니다. 유대인들이 애굽에서 환영받던 시대가 끝이 나고, 핍박받는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바로가 하나님을 알았던 시대가 끝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애굽으로 이주하여 살던 시대가 끝나고, 애굽에서 출국해야 할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요셉이 관속에 들어간 시대가 끝이 나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한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장에는 새 시대를 향한 진통이 나옵니다. 새 시대를 향해 나아가는 민족적 진통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오늘 1장에서 보여주시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첫째로, 약속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1-7).

 

우리는 오늘의 현실을 보면서 하나님이 침묵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창세기가 끝난 후 400여 년 동안 긴 침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무슨 일이 읽어났습니까? 1절부터 7절까지는 400여 년의 긴 침묵 속에서 일어난 유다 민족에 대하여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간략한 기록입니다.

 

야곱이 살던 시절 큰 가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일강이 있는 애굽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한 생활고에 의한 피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을 성취하기 위한 예비적 조치였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의 시기와 질투로 애굽에 팔려갔습니다. 그런데 그것 역시 하나님의 예비된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셈족 가운데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무엇이라고 약속해 주었습니까? 창세기 15장 13-14절 말씀을 보십시오. "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14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그러면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약속하셨습니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2).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창 22:17).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는 야곱에게 하나님은 무엇을 약속해 주었습니까?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창 46:3).

 

1절에 보면 야곱과 함께 각기 가족을 데리고 그의 아들들이 애굽에 이르렀지만 7절에 보니 어떻게 되었다고 하십니까?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고 하였습니다. 온 땅은 고센 지역을 말합니다. 70인으로 시작하여 창대하게 번성하였습니다. 400여 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이스라엘 자손은 한 국가를 이룰 만큼 수가 불어났습니다. 침묵의 시기는 절망의 시기가 아닙니다. 의심의 시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소망하는 시기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우리의 기도가 더디 이루어진다고 낙심하며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셉이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데는 옥중 생활 3년 침묵의 시기가 있었습니다. 다윗이 새로운 왕조를 건설하는 데는 사울에게 쫓겨 다니면 갖은 고생을 한 13년 내지 17년의 긴 침묵의 시기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회당제도를 확보하고 메시야에 대한 소망을 더욱 갖게 되기까지는 바벨론 포로 70년이라는 긴 침묵의 시기가 있었습니다. 새 시대를 준비하는 느헤미야도 포로로 잡혀가 있는 침묵의 시기가 있었고, 새 시대를 준비하는 에스더에게도 침묵의 시기가 있었습니다. 1세기를 새롭게 변화시켰던 바울에게도 침묵의 시기가 있었고, 복음으로 새로운 구원의 세계를 펼쳐 가신 예수님에게도 30년이라는 침묵의 시기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긴 침묵이 있다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시고 있고 그 침묵의 과정의 끝에 가보면 어느새 하나님의 뜻이 성취된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5장은 말씀합니다.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둘째, 진통을 통해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8-14).

 

이스라엘 민족의 번영하였습니다. 참으로 기름진 옥토에서 요셉의 덕을 보며 행복하게 살 줄 알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곳에 보낸 이유를 까마득하게 잃어버리고 살 수밖에 없은 환경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들이 그곳에서 계속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준비할 시간이 되면 그곳에서 나와 하나님이 약속한 땅으로 가야 합니다. 그리고 복의 근원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탄생시켜야 할 민족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곳에서 안락하게 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통이라는 극약 처방을 하시는 것입니다.

 

애굽에 새로운 왕이 등장하였습니다. 8절에 보십시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었습니다. 요셉을 총리로 등용한 왕은 셈족 계통인 힉소스 왕조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함족 계통인 투트모스 1세가 바로 왕이 되었습니다. 요셉을 알지 못했다는 말은 요셉을 완전히 몰랐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요셉이 죽은지 280여 년이 지났지만, 역사 속에서 큰 업적을 남긴 사람을 모를 리는 없을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새로운 왕조는 힉소스 왕조의 업적을 의도적으로 말살하였습니다. 셈족인 요셉의 업적도 의도적으로 과소평가한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강하게 하였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요셉이 애굽에 와서 애굽 사람들에게 어떤 역할을 하고, 애굽 사람들이 기근으로 죽을 때에 어떻게 은혜를 베풀었는가를 의도적으로 외면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하면 그들을 마음대로 숙청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입증해주는 단어가 '일어나'라는 말입니다(8절). 이 말은 단순히 뒤를 이었다는 뜻이 아니라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그가 새로운 애굽 왕 바로가 되어 정권을 잡고 새로운 세상을 펼쳐나갈 때 무슨 일을 하는 것입니까?

 

1) 잘못된 현실 파악

9절입니다. "그가 그 백성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큰 민족이 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주 많고 아주 강하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엄청난 인구가 오히려 그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빌미가 되어 전에 없었던 위태로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공동번역은 9절을 "보아라, 이스라엘 백성이 이렇게 무섭게 불어나니 큰일이다"라고 좀 더 실감나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왕이 신하들에게 이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보다 많고 강하다고 말합니다. 현실 파악을 왜곡해서 판단하는 것입니다.

 

백성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견제하고 숙청하기 위한 명분을 제공하기 위해서 입니다. 고센 지방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전체 애굽 사람에 비하면 얼마나 강하고 많겠습니까? 사실에 근거하여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도적으로 과장 해석하여 선동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놀라운 증가에 대하여 두려움과 증오심이 표출된 과장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애굽인들로 하여금 유대인에 대한 증오심과 민족 감정을 부추겨 그들에 대한 탄압과 착취를 정당화시키려는 저의를 가지고 여론을 만드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오늘날 정치적 언론들이 국민을 자신들의 의도에 맞게 이끌어가기 위해 사용하는 수법입니다.

 

2) 잘못된 미래 추측

그래서 바로는 국민에게 무엇을 제안합니까? 10절입니다.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 하고." 지혜롭게 다루자는 것입니다. 그대로 방치할 때 미래가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잘못된 추측을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 적과 연합하여 자신들을 대적하고 이 땅에서 떠날 것이라고 추측한 것입니다. 요셉 때에 자신의 민족이 기근으로 죽을 위치에 처했을 때 민족을 살려 주었는데 그것과는 정반대로 해석하고 추측하는 것입니다.

 

압제하는 이유는 두려움입니다. 첫째는 민족적 동질성과 단결력이 강한 이스라엘 민족의 급격한 수적 번성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것입니다. 둘째는 애굽 북쪽의 군사적 요충지인 고센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이 당시 애굽의 주위 열강들과 제휴하여 애굽을 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입니다. 셋째는 애굽에 막대한 노동력을 제공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탈출함으로 막대한 노동력 상실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3) 잘못된 현실 대책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무엇을 합니까? 첫 번째 대책은 법과 제도를 통해 통제하는 방법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부과한 강제 노동법이었습니다. 가혹한 육체적 노동을 시켜서 출산억제 정책을 썼던 것입니다. 11절을 봅시다.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에게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 위에 감독들을 세우고 무거운 중노동을 시켰습니다. 그들로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했습니다. 국고성은 군대를 위해 양식과 병기를 저장하는 성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해야만 되었습니다. 이들은 불의한 왕 바로를 위하여 죽도록 충성해야만 되었습니다. 이런 삶은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몸도 마음도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가혹한 노동력 착취로 육체적 건강 빼앗아 수명을 단축하기 위해서입니다. 수적 증가를 막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의도대로 되었습니까?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가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갔습니다. 더욱 잘되는 것입니다. 더욱 수가 많아지는 것입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은 지쳐 죽어야 하는데 아이는 더 낳고 있는 사람도 더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이 때 애굽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더 큰 강도로 압박을 가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말살하기 위한 두 번째 방법을 쓰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혹독한 탄압정책을 쓰는 것입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13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을 엄하게 시켜 14 어려운 노동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일이 모두 엄하였더라."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을 다 엄하게 했습니다. 일상생활입니다. 부인과 아기자기하게 이야기하고 애정을 표현할 수 있는 시간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엄격하게 통제하여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하고 살아 있는 사람은 지치고 병들어 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당시 애굽의 감독들은 매우 잔인했습니다. 당시의 벽화들에는 나체가 된 인부들을 엎드려놓고 가죽 채찍으로 사정없이 치는 장면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그림에는 "내 손에는 매가 있다. 게으르지 말라"는 문구까지 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루아침에 애굽의 노예로 전락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가 기록한 유대고대사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애굽인들은 일하기 싫어하고 허약하여 환락에 빠지고 반대로 이스라엘인은 열심히 일하여 부를 축적하였는데 그들은 시기가 나서 히브리인들의 번창이 자기들의 손해라고 생각하였다. 세월이 지나 요셉이 베풀었던 은혜는 망각하고 특별히 왕권이 다른 가문으로 넘어가자 이스라엘을 학대하기 시작하였는데 수로를 파게 하고, 성벽과 피라밋을 건설하게 하였다."

 

그래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 번성하게 됩니다. 그러자 바로는 더 잔인한 방법을 사용합니다. 직접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법도 제도도, 체면도 양심도 상관이 없습니다. 반발하려면 하라는 것입니다. 통치자의 최후 선언이고 노골적으로 속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15절을 보면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2명을 불렀습니다. 아마 이들을 산파들의 대표일 것입니다. 이들 밑에 많은 산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한 명령은 무엇입니까? 16절입니다. "이르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해산을 도울 때 아들이면 다 죽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딸은 살려두라는 것입니다. 여자들은 노예로 사용하고, 설령 결혼을 한다고 해도 함족과 결혼을 하면 함족이 되기 때문에 셈족인 유대인을 완전히 말살시키기 위한 방책입니다.

 

강제노동은 이스라엘의 기를 꺾고 서서히 인구를 줄여나가는 점진적인 방법이었는데, 이 정책이 실패로 돌아가자 애굽왕 바로는 더욱 확실하고 직접적인 방법을 채택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 바로가 남자아이를 죽이는 것은 이스라엘의 미래를 없애는 행위입니다. 지금 당장은 성인 노동력을 이용하여 그 기세를 꺾는 동시에 남자 아이를 죽여 미래를 없앰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을 떠나지 못하도록 원천봉쇄 하자는 속셈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박해가 있을 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쓰임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행 1:8). 그러나 그들은 떠나지 않습니다.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예루살렘에 큰 핍박이 일어납니다. 스데반이 순교합니다. 그러자 사도들을 제외하고 온 성도들이 유대와 사마리아와 온 이방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빌립 집사님을 통해 개처럼 취급하며 가기 싫어하던 지역이었던 사마리아에 부흥 운동이 일어납니다. 안디옥 교회에 부흥 운동이 일어나고 세계 선교를 감당하게 됩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핍박이 일어난 이후에 각지로 흩어진 사람들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증언하면서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번영이 되면 쉽게 세상과 타협하고 하나님의 뜻을 잃어버립니다. 핍박을 통해 종교 개혁이 일어났습니다. 핍박을 통해 교회는 개혁되고 순수해졌습니다.

 

셋째, 진통 중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통해 보호해 주시고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15-22).

 

핍박은 참기 힘듭니다. 핍박만 계속된다면 결국 이스라엘 민족은 이 땅에서 살아졌을 것이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메시야 언약은 성취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시대마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건한 사람들을 늘 준비해 두십니다. 아합의 폭정 속에서 여호와 신앙이 말살될 것 같았지만 엘리야와 엘리사를 남겨 두셨습니다. 이름도 없는 7000명을 남겨 두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새로운 시대를 위해 남겨 놓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산파 십브라와 부아입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세상의 권력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 애굽 왕의 명을 어겼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보이는 바로의 권력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더 두렵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쉬운 일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권력에 양심적으로 신앙적으로 불복종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산파들은 잘못된 바로 왕의 명령에 불복종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여기 두 종류의 두려움이 나옵니다. 먼저 바로의 두려움입니다. 그 당시의 바로는 나라의 최고 통치자인 동시에 신 그 자체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 권위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 하늘을 찌를 듯한 것이었습니다. 그처럼 얼핏 보기에는 세상에서 아무 두려워할 것이 없어 보이는 바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전혀 뜻밖의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 두려움은 곧 자기의 통치 아래에 있는 백성, 그것도 자국민도 아닌 외국인 영주권자에 불과했던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9절에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수적 팽창을 두고 염려를 했습니다. 10절에 보니, 특히 애굽에 외적의 침입이 있을 경우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역을 일으켜 외적과 손을 잡고 오히려 애굽을 공격해 오지 않을까 두려워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들의 인생이 바로 다른 사람들에게 달려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외적의 침략이 있을 경우 이스라엘 백성의 반응 여하에 따라 자기네 국운이 다 달려 있다고 생각하니 자연히 그 사람들이 두려워졌던 것입니다.

 

12b절에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여'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 '근심하여'라는 말은 '두려워하여'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쉬운성경은 '그러자 이집트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더욱 두려워하여'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에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가지는 대표적인 두려움입니다. 하나님 모르는 사람에게 남게 되는 두려움의 대상 제1호는 곧 다른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으로서는 자기 인생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고 결정적인 힘을 가진 존재란 다른 사람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내 삶의 행복은 오로지 우리 회사 사장이 내게 주는 봉급의 액수에 달려 있다'라고 생각하면 바로 그때부터 그 사람은 그 사장의 눈치만 살피며 그 사장을 두려워하는 인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앞의 2년 군대 생활은 오로지 이 고참이 얼마나 날 잘 봐 주느냐에 달려 있다'라고 생각하는 신병은 자신의 모든 군 생활에서 고참을 겁내며 하루하루 지새울 수밖에 딴 도리가 없습니다. 이처럼 '내 인생이 저 사람의 손에 달려 있다'라고 생각이 될 때, 그때부터 사람은 바로 그 사람으로 인하여 염려하고 근심하고 두려워하게 되어 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이 같은 사람들이 우리의 인생을 좌우하고 결정짓는 절대자이며 전능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바로와는 대조적인 두려움을 가졌던 특별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산파들입니다. 바로 왕의 명령을 받게 된 히브리 산파 당사자들로서는 보통 큰 고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 사회에서 바로가 가진 권위라는 것은 오늘날의 대통령 정도로는 아예 비교의 상대도 되지 못할 정도로 절대적이었습니다. 옛날에 우는 아이 달래기 위해서 '울면 호랑이가 와서 잡아 간다', 또 '순사가 잡아 간다'고 겁을 주었지만, 당시 바로란 명칭은 애굽 백성들이 아예 입에 올리기조차 싫어할 정도로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산파들은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이들을 살렸다고 했습니다. 그 바로의 명령에 불복종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목숨이 열 개 있어도 모자랄 만큼 위험하고도 두려운 것이었는데, 그 산파들은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이겠습니까? 바로의 명령쯤은 코웃음치고 넘길만한 초인간적인 용기가 있어서 그랬습니까? 아마 틀림없이 그들도 정말 간이 조마조마했을 것입니다. 아니면 겁나기는 하지만 멀쩡한 아이를 죽일 수는 없다는 남다른 정의감이 불타서 그럴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 것도 아니었습니다.

 

본문 말씀은 단 한 가지 이유를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17절). 분명히 애굽 왕도 엄청나게 두렵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는 훨씬 두려운 대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명령 불복종이 드러나 온갖 고초를 당하고 옥살이나 사형까지 당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두려워지는 마음은 그런 애굽 왕이 겁나는 정도에 비하면 도무지 상대도 되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혜롭게 선택한 올바른 두려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훨씬 더 강하신 분을 제대로 두려워했던 것이고, 그 결과 애굽 왕이 주는 무슨 사례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상급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바로 왕의 권력보다 두려워하여 자신의 목숨을 걸고 생명을 살리려고 했던 산파들에게 어떻게 하였습니까? 20절을 새번역으로 읽어드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며, 이스라엘 백성은 크게 불어났고, 매우 강해졌다."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죽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계속적으로 아이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졌다고 했습니다.

 

산파 개인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21절 말씀입니다.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 하나님의 복을 받아 집안을 흥왕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여기의 「경외」라는 말은 17절의 하나님을 「두려워하여」라는 말과 히브리어 원문상으로는 꼭 같은 단어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세야말로 '하나님께 제일 잘 보일 수 있는 자세'였던 까닭에 그들은 그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으며, 결국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대표적으로 결핍되고 있는 자세가 바로 이 '경외' 즉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모시는 자세'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말할 때 '경외'라는 단어가 점점 사라짐과 동시에 그 자리를 대신해서 독점해 가는 것이 바로 '사랑'이란 단어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절대 주권자의 위치에서 점점 끌어 내려져서 이제 사람과 일대일로 평등하게 사랑을 나누는 나란한 자리에까지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처럼 무섭고 엄한 분이 아니며 우리 인생들이 부담감을 느끼며 섬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그야말로 마음 좋은 할아버지처럼 쉽게 대할 수 있는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사람 편에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때에는, 그 사랑에 '경외'라는 결정적인 요소가 들어 있지 않으면 다른 그 어떤 아름다운 수식을 동원한 사랑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오로지 불경이며, 신성 모독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반면에 '경외'라는 단어가 하나님 앞에서 씌어질 때면, 그것은 어떤 공포의 대상을 두고 벌벌 떠는 두려움이 결코 아니라 그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진짜 사랑답게 만드는 '사랑의 떨림'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지금 얼마나 경외하며 섬기고 계십니까? 주일을 지키지 못하여 하나님 앞에서 떨리는 것이 직장에 결근하여 사장 앞에 떨리는 것과 비교해 볼 때 어느 쪽이 더 큽니까? 마땅히 바쳐야 할 십일조를 빼돌리면서 조금 마음에 찝찝한 기분을, 세금 보고를 조작하면서 '국세청 직원에게 들키면 어쩌나?' 하고 초조해 하는 마음과 비교해 볼 때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분명히 명하신 것을 저지를 때 양심의 가책을 느끼시는 정도를, 속도 위반하다가 뒤에서 교통순경이 사이렌 울리며 따라올 때 '아이쿠'하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게 되는 심정과 서로 비교해 본다면, 어느 쪽의 진동이 더 큽니까? 살아 계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이 '여호와 경외의 신앙'을 지킴으로써 그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고 그 대신 그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누리게 되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신사참배를 가지고 우리나라의 기독교를 위협해 왔을 때, 이 나라의 목사들은 그들이 정말 누구를 두려워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밝혀야만 할 갈림길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일본 천황을 두려워했던 목사들은 그 천황이 명령하는 우상숭배의 죄악을 스스로 저질렀으며, 자기 교인들 역시 그 죄악에 함께 빠지도록 만들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했던 자들은, 아니 천황도 두렵기는 했겠지만, 그보다는 하나님을 훨씬 더 두려워할 줄 알았던 목사들만이 '바로의 명령을 어기고' 교회의 정절을 지켰고, 성도의 신앙을 사수했던 것입니다. 우리 조국이 끝내 일제의 압제를 벗어나서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던 진짜 이유는, 바로 이 소수의 '하나님 경외하는 신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인 줄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누구를 두려워하며 살고 있습니까? 몸을 죽여도 영혼을 죽이지 못할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몸과 영혼을 함께 지옥불에 던지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고 계십니까? 우리의 인생은 사람의 손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한시라도 잊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며 섬기는 가운데 그 은혜를 누면서 사는 하나님의 참된 백성들이 되시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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