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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섭리[출 2장 1-10]

조회 수 426 추천 수 0 2018.09.15 20:20:08

하나님의 섭리[출 2장 1-10]

 

1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어 2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3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고 4 그의 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고 멀리 섰더니 5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일 강으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나일 강 가를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6 열고 그 아기를 보니 아기가 우는지라 그가 그를 불쌍히 여겨 이르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 7 그의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이르되 "내가 가서 당신을 위하여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이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하리이까?" 8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하매 그 소녀가 가서 그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오니 9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기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10 그 아기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가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여 이르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

 

지난 주에 1장을 통해서 억압받는 이스라엘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1장에 세 가지 억압 정책이 나타나고 있는데 첫째는 가혹한 육체적인 노동으로 출산 억제 정책을 썼습니다.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고 늘어나자 애굽 백성들은 더욱 근심하게 되었습니다(12). 그래서 두 번째 방법을 쓰게 되었는데 산파들을 통하여 히브리 남자아이들을 죽이는 정책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건한 산파들을 두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바로는 이제 전국적이고 공개적으로 히브리 남자아이들이 태어날 때 나일 강 하수에 던지라고 명령을 내립니다(22).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은 더욱 거세졌고, 제도화되고, 일반화되었습니다. 이런 억압은 삶의 희망을 잃게 하고 생명을 시들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아기를 낳는 것이 축복이 아니라 근심과 걱정과 고통이 되었습니다.

 

이에 ''장차 이스라엘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장차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질문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구약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하나의 정신은 하나님의 나라로서의 이스라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을 다스리시고 섭리하시는 가를 보여 주며, 동시에 그 나라 백성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자신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실천해 가야 하는 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제 초점은 한 아기에게로 모아집니다. 이 아이를 통해서 온 백성의 운명이 모아지기 때문입니다. 새 생명의 탄생은 흔히 새로운 희망의 출발이며, 새로운 삶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창 21장의 이삭의 탄생, 삿 13장의 삼손의 탄생, 삼상 1장의 사무엘의 탄생, 신약으로 넘어와서 세례 요한의 탄생,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그러합니다.

 

본문은 한 아기의 탄생에 대하여 자세한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그 부모의 이름도 소개되지 않습니다. 그의 누이도, 또 그보다 먼저 태어난 아론이란 형이 있는데도 여기서는 언급되지 않습니다. 이 아기를 양자로 입양한 바로의 공주의 이름도 소개되지 않습니다. 오직 한 아기의 출생과 그가 어떤 위협으로부터 보존되었는가 하는 것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 아기가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모세가 하나님의 나라의 주인이실 한 분의 모형으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는 불행한 시대에 아이로 태어나 살아남기도 불가능했던 모세라는 사람을 도리어 불행에 짓눌린 한 민족을 구원하는 해방자로 키워내기 위하여 완벽하게 관리하시는 하나님, 역사와 만사의 주관자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만나게 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스라엘은 최대의 위기를 만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대로, 번성할 만큼 번성했기 때문에 이제 애굽을 떠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도록 내보내시는 과정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가서 하나님의 일을 해야만 하는 이스라엘이, 애굽 땅이 좋다고 눌러앉으려고 하니까, 그들에게 애굽에 대한 정을 떼고, 나갈 준비를 시키는 과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실패가 없으며, 하나님이 세우신 작정에는 변경이 없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하나님이 계획하셨고, 자신의 거룩한 목적을 위해서 번성하게 하셨고 이끌고 계셨지만, 아직 아무도 그것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다만 애굽의 고역에 견딜 수 없어서 눈물로 호소하며 기도하기 시작하였고, 애굽에 정이 떨어지기 시작하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고통과 눈물과 힘든 여정도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과정이었고, 그들을 구원하여 더 크고 놀라운 사명을 주시고, 그들을 통해 일하시고 더 큰 복을 누리게 하시려는 계획의 일환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이루게 하시려고 한 가정을 준비하셨는데, 바로 모세의 부모가 그들입니다.

오늘 이 모세의 부모의 믿음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히 11장 23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첫째로, 믿음은 보는 것입니다.

 

1절에 보면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뒤에 모세의 부모의 이름들이 나타납니다만 여기에는 그들의 이름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대신에 그들의 믿음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모세는 "아들을 낳으면 나일 강에 집어 던지라"고 하는 서슬이 시퍼런 바로의 명령이 떨어진 그 순간에 태어났습니다. 만약에 아이를 살리려 하면 그 부모들까지도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실로 뼈를 깎는 고통을 모세의 부모는 가졌을 것입니다. 민족적으로 볼 때도 남자가 없어지는 소망이 사라지는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출생은 부모에게 기쁨이기보다는 근심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2절에 보면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하여 행 7장 20절에서는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의 아버지의 집에서 석 달 동안 길리더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히 11장 2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잘 생긴 것을 보고' 이 말을 원문대로 옮기면 '그는 매우 좋았다, 또는 아름다웠다'로 번역되어 집니다. 이 단어는 창 1장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창조 기사에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시는데 그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의도 대로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잘 생긴 것을 보고' 이 말은 모세가 외적으로 잘 생겼다는 뜻도 있지만 '맡은 일을 수행할 수 있는 목적에 합당한 자'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행 7장 20절에서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라고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수행하기에 합당하다는 신학적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모세가 태어났을 때, 모세의 부모는 '이 아이가 하나님이 쓰실 아이로구나'라는 것을 그들은 알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위해 귀하게 쓰임 받을 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모세의 부모는 외형보다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아들, 하나님께서 이 아들을 통해서 하실 일이 있다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본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자녀가 부모에게서 태어나지만 부모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내 아들, 내 딸이라는 생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한 생명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은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있으셔서 보내신 것입니다. 다만 부모에게 양육을 맡기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부모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내 뜻대로 자녀를 키우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키워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도 이 사실을 강조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우리에게 주신 자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부모의 욕심과 희망과 이기적인 생각으로 아이들을 가리키고 대학의 전공을 선택하게 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자녀를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녀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볼 수 있는 믿음의 시력이 좋아야 합니다.

 

엡 1장 18-19절에 보면 바울 사도는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19 또한 믿는 사람들인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여러분이 알기 바랍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보통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갑판 위에서 수평선을 바라보면서 한 사람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고, 다른 한 사람은 증기선이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은 육안으로 그냥 보니 안 보였고, 다른 한 사람은 망원경을 통해서 보았기 때문에 증기선이 보인 것입니다. 믿음은 망원경 같아서 시인 에머슨이 말한 것처럼 "종달새의 알을 보고 나뭇가지로 날아와서 지저귀는 새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 11장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감각의 세계를 더 좋아하고 과학적인 증거를 더 믿으며, 통계에 의존하여 매사를 결정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세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믿음의 눈을 밝혀 주실 때는 영원한 세계가 있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즐거움으로 그 세계를 붙잡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모세의 부모가 가졌던 믿음의 눈들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어떠한 환난을 만나도 그 환난 속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을 바라보고 기뻐하며 감사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믿음은 행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 의하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행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부모는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있었기 때문에 모세를 죽이지 않고 석 달을 숨겨 길렀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어떤 계획이 있을 것이라고 단순히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모세의 부모는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그래서 히 11장 23절에는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며." 길렀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레위 족속의 가정에 한 남자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 아이는 장차 이스라엘을 구원할 아이입니다. 남자 아이를 낳으면 당장 나일 강에 던지라는 바로의 명령이 시퍼런데, 이스라엘의 구원자를 그것도 어린 아이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가 어떻게 살아남으며, 그가 살아남는다 하여도 언제 자라서 시급한 이스라엘을 구원한단 말입니까? 그러니까 모세의 출생은 이스라엘의 해방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건처럼 보였고, 그 아이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거라는 희망은 아무도 갖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망 없는 방법으로 당신의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때때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사람이 보면, 무모하게 보이고 우리의 상황에는 도대체 맞지 않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국 선을 이루셔서 당신이 선택한 방법이 최선이었음을 입증시키십니다.

 

참 믿음은 용기를 산출합니다. 모세를 길렀던 석 달은 모세의 부모가 모세를 숨겨가며 기를 수 있었던 최선의 기간입니다. 믿음은 언제나 무사안일을 낳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최선을 다하게 하는 것입니다. 2장 3절에 보면 "더 숨길 수 없이 될 때까지" 자식을 길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믿기 때문에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엘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3년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던 땅에 하나님께서 비를 주시리라고 아합 왕에게 가서 전합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믿었습니다. 믿었기에 그는 소극적으로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그는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간절하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응답이 있기까지 7번이나 기도했습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최선을 다하게 만든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최선을 다할 수 없습니다.

 

훌륭한 믿음의 부모 밑에서 훌륭한 믿음의 자녀가 태어납니다. 거꾸로 말하면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바로 자라기 위해서는 부모의 기도와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과 그 말씀을 의지하는 것보다 더 좋은 치료약은 없습니다. 아무리 바로가 이스라엘을 억압하고 여러 가지 잔악한 방법을 행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역사의 절망적인 상황에서라도 자신의 경건한 믿음의 자녀들을 남기시며,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부모가 모세를 장성하도록 키울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다 아시면서도 그들에게 아들을 주셨습니다. 왜 모르시겠습니까? 그리고 그들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한계를 아시면서, 그리로 인간의 능력으로 당신의 뜻을 이룰 수 없는 줄을 아시면서도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하라고 하십니다. 끝까지 이룰 힘이 없다고 포기하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을 만났던지,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 하는 것과, 그 다음은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면서 기다리는 것이 우리가 가야할 길이고 성공의 비결임을 말씀하십니다.

 

모세의 부모는 자기들 위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 아이를 살릴 때 자기들의 목숨이 위험해지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먼저 하나님의 뜻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믿음으로 행했습니다. 믿음은 단순한 사고가 아닙니다. 그것은 행동입니다. 우리가 이 시대를 위하여 남겨 놓으신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행동으로 내 믿음이 살아있음을 증거하는 귀한 역사들이 삶 속에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셋째, 믿음은 맡기는 것입니다.

 

모세의 부모가 석 달 동안을 최선을 다해 숨기다가 더 이상 숨길 수 없을 때가 되니까 갈대 상자에 담아 나일 강에 띄우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맡기는 행위입니다. 여기 갈대 상자는 왕골 상자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나일강 삼각주의 진흙지대에 무성했던 파피루스로 만든 상자입니다. 파피루스는 성장이 매우 빠른 식물로서 줄기는 삼각형의 모양을 하고 있고 손가락 굵기로 약 3M 정도 자라난다고 합니다. 섬유질이 많아서 종이 또는 배를 만드는 재료로 쓰였을 뿐 아니라 신발이나 밧줄의 주원료이기도 했습니다. 상자로 번역되어진 히브리어 '테바'는 노아의 방주에도 사용되는 단어로 배 모양이 아니라 방주 모양으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조타 장치가 없는 방주는 오로지 하나님의 자비하신 인도와 보호만을 의지하면서 생명을 위협하는 물로부터 생명을 구원하는 도구로 쓰였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갈대 상자에다가 당시 방부, 방수의 재료로 쓰였던 역청과 나무진을 칠하고 그 속에 아이를 누이고 강가 갈대 숲으로 놓아두었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절망 속에서 아이를 버린 것이 아니라 아기를 보호하기 위하여 온갖 지혜를 다 쓰고 최선을 다한 뒤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본 것입니다. 아마도 모세의 부모는 노아의 방주를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방주 속에 있었던 노아의 가족들을 살려주신 하나님께서 모세도 방주 속에 있으면 물 속에서 건져내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나갈 것을 믿고 행한 것입니다.

 

모세의 부모는 하나님을 믿고 아이를 키웠습니다. 그런데 석 달이 지나자 더 이상 아이를 집에다 기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커서 그 우는소리가 더 커졌기 때문입니다. 이 때 어떤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까? '믿어도 소용이 없구나.' '우리까지도 위험하게 되었구나' 하며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부모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가장 먼저 내린 결론은 더 이상 자기들이 이 아이를 키울 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을 인정하고 출발하였습니다. 그러면 이 아이가 살 수 있는 길이 무엇입니까? 단 하나의 길이 있습니다.

이 아이를 애굽인에게 입양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매우 현실적이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아이를 입양시켜야 합니까? 그들은 나일 강으로 애굽의 귀부인들이 목욕하러 나오는 것을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그들에게로 아이를 갖다 두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로 아이가 떠내려가도록 갈대 상자를 준비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이는 멀리서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신앙은 운명만 믿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은 철저하게 이성적이고 철저하게 논리적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자신들이 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인간의 노력이 끝나는 곳에서부터 일을 시작하시며, 또 역사하십니다. 바로 이 버려진 때가 하나님께서 직접 일을 하시는 때입니다. 이제 인간이 할 수 없다, 죽었다고 두 손을 들 때 하나님께서 역사를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모세를 구하셨다는 구절은 없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로 보호받았고, 인도받았고, 오늘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지난날을 뒤돌아보십시오. 도저히 구원이란 말은 생각하지도 못하던 죄인이었는데 어느 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구원의 방주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첫째, 하나님은 시간의 주관자이십니다. 이 기막힌 타이밍을 보십시오. 모세가 강에 버려지는 그 날에, 바로의 딸인 공주가 목욕하려고 나일 강에 나왔습니다. 등을 가렵게 하셔서 목욕을 생각했는지, 너무 더워서 목욕을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공주는 시녀들과 함께 강가로 나왔습니다. 날짜만 같은 날이 아닙니다. 시간이 중요합니다. 나일 강 갈대숲에는 악어가 득실거립니다. 모세의 부모가 모세를 갈대 사이에 띄우고 간 뒤에, 여러 시간이 흘렀다면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고, 어디서 악어가 삼킬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모세가 갈대 사이에 버려진 바로 그 시각에 목욕하러 나왔다가, 그 순간 공주의 눈에 상자에 들어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녀로 하여금 갈대 상자를 발견하게 하시고 호기심을 갖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시나리오를 쓰고 카메라가 돌아가는 앞에서 시간을 맞추어 연기를 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시나리오를 쓰시고,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일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주관하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시간의 주관자이십니다.

 

둘째. 하나님은 공간의 주관자이십니다. 나일 강은 길이가 수천 킬로미터나 되는 아주 긴 강입니다. 만약 모세가 버려진 장소와, 바로의 공주가 목욕하러 온 장소가 몇백 미터만 차이가 나도 발견할 수가 없었을 것이고, 모세는 건짐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공주는 왕궁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궁중에 공주를 위한 목욕시설이 없겠습니까? 그 물이 강물보다 깨끗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궁내에서 목욕하지 않고 강가로 나와서 목욕을 했고, 그 자리가 바로 모세가 버려진 자리였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연출하신 것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마음의 주관자이십니다. 시간과 공간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져서 바로의 공주가 모세의 갈대 상자를 보았고, 시녀에게 명하여 건져 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건져 와서 상자를 열어보니, 갓난아이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회가 될 수 있었을까요? 아니면 위기가 될 확률이 더 높았을까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선 보통의 경우라면, 괘씸한 생각이 들어야 합니다. 자기 아버지인 애굽 왕 바로가 엄히 명하여 히브리인이 남자아이를 낳을 경우에는 다 죽이라고 했거늘, 출생하자마자 죽이지 않고 이만큼이나 감추어 기른 아이의 부모는 국법을 어긴 사람입니다. 그러니, 바로의 딸인 공주의 마음에 괘씸한 놈들의 자식이라고 하면서 분노가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만약에 공주가 분노하고 괘씸한 마음이 들었다면 그 상자를 그냥 강물에 엎어버리고, 아이를 숨겨 기른 부모를 색출하라고 했을 것입니다.

 

히브리 아이인 것을 안 애굽 공주가 "아이, 재수 없어. 물에 엎어버려!" 시녀들에게 얼마든지 명령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아니면 "불쌍하기는 하지만 살려주면 우리 아빠 바로 왕이 노하실 거야. 버려!" 얼마든지 이럴 수도 있었습니다.

 

모세의 생명에 절체절명의 위기가 왔습니다. 그러나 공주는 이 아이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간섭이 없이 어찌 이 마음을 간직할 수 있었을까요?

 

상자를 여는 순간, 아이가 "앙~!" 하고 울었습니다. 우는 아이를 보는 순간, 공주는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이 문득 밀려왔습니다. "세상에 이 어린 것이 무슨 죄가 있다고, 히브리인에게 태어났다고 해서 이렇게 크지도 못하고 죽게 되었구나" 하는, 참으로 불쌍한 생각이 막 밀려들었습니다. 그래서 공주는 아이를 얼른 건져 품에 안았습니다. 그리고 아이에게 남아있었을 히브리인의 흔적을 없애버리고 자기의 아들로 삼을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 주석가는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공주가 갈대 상자를 여는 순간 천사를 보내셔서 아이의 엉덩이를 꼬집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아기의 이 울음소리가 공주의 마음에 잠자고 있었던 모성애의 본능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괘씸함과 긍휼의 차이를 아십니까? 같은 사건인데도, 어떤 사람을 볼 때는 불쌍한 마음이 들고, 어떤 사람을 볼 때는 괘씸한 마음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사람은 누구도 자기 마음도 다스리지 못하고 남의 마음은 더더욱 다스릴 수가 없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지으신 분이고 마음을 다스리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지배하는 방법은 사람의 마음을 다스림으로서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과 생명을 맡기고 따라갈 분은 하나님 뿐입니다. 그러니까 모세를 구한 것은 바로의 공주였지만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모세가 바로의 공주의 집에 입양된 것은 하나님의 간섭 없이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넷째. 하나님은 만남의 주관자이십니다. 부모를 따라서 동생 모세를 버리는 장소에 따라왔던 모세의 누이는 부모가 떠나간 뒤에도 갈대숲 사이에 머물며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주가 목욕하러 오더니 아이를 건져내는 것이 아닙니까? 모세의 누이는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주는 아이를 보자마자 불쌍하게 여겨 자기의 품에 안는 것이었습니다. 미리암은 즉시 공주에게로 달려갔습니다. "공주님, 그 아이를 기르시려면 젖이 필요할 텐데, 젖 잘나고 마음 착한 유모를 소개시켜 드릴까요?" 미리암은 공주를 만났습니다. 하나님이 용기를 주셔서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는데, 미리암의 말을 들은 공주는 기꺼이 수락했습니다. "네가 정말 그런 사람을 아느냐? 그럼 우리 아이를 맡을 유모를 내게 데리고 오너라." 그래서 모세의 누이와 공주의 만남은 모세와 어머니의 만남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그 무서운 때에 모세의 부모는 양육비를 받아가며 자기의 아들을 당당하게 키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요, 하나님의 보호하심입니다. 모세는 젖을 뗄 때까지 모세를 길렀고, 공주는 이 아이를 데려다가 자기 아들로 삼고 이름을 모세라 지었습니다.

 

이제 바로가 쌓아 두었던 재물이 모세를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키우기 위해서 사용됩니다. 바로가 그토록 죽이기 원했던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자를 자기 손으로, 자기 재물로 키우게 된 것입니다. 당시 메소포타미아 법에 의하면 유모가 자기 집에서 일정 기간 동안 아이를 젖 먹이며 기르면 그에 대한 삯을 주게 되어 있었고, 그 기간은 대략 2-4년이 끝나 아기를 데려오면 그때 정식으로 양자를 삼았는데, 왜냐하면 당시에는 유아 사망률이 높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되어진 과정의 하나하나가, 세상만사를 주관하시는 주관자 하나님의 섭리의 극치를 보여주는 장면들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환경은 제 몸으로 낳은 사랑하는 아들을 강에 내다 버려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절망에도 상관없이 자신의 일을 진행하십니다. 그리고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의 시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부부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이제 모세는 어머니의 신앙적 지도 아래서 성장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이처럼 처음에는 미미하게 별다를 것이 없는 것처럼 평범하게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서 시작되고 진행되어져 갑니다. 태어나는 이스라엘의 모든 사내 아이들을 죽이라고 명령을 내린 사람은 바로 애굽의 바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바로 왕의 딸이 그 어명을 어기고 그 아기의 생명을 구하며 나아가 모세가 그 죽음의 세력인 궁중에 들어감은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입니까? 더구나 모세의 어머니가 직접 그 아기를 돌보고 키우는 것은 얼마나 놀랍고도 완벽한 섭리입니까?

 

하나님의 이러한 섭리 아래서 모세는 궁중에 들어갔고 공주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얻게 됩니다. 그는 그렇게 해서 우선 생명을 건졌고, 당대 세계 최고의 문명국가인 애굽에서 왕재들이 받는 최고학문을 수학하며 장래를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그 일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고, 아무도 그 일을 가로막지 못했습니다.

 

한동대 김영길 총장의 부인 김영애 교수가 쓴 [갈대 상자]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김영애 사모님은 한동대를 세우고 지탱해 가면서 겪은 온갖 시련과 고통, 그 고난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버텨갈 때 하나님이 어떻게 도우셨는가,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을 보내서 어떻게 역사를 하셨는가를 감동의 스토리로 엮어 갑니다.

 

한 서평에서 [갈대 상자]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한 토막을 읽어봅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 갈대 상자는 절망의 상자이며 불행의 절정이다. 갈대 상자는 불행한 시대에 어떻게 하다 보니 태어나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아 나일강에 버려진 무의미한 상자에 불과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상자. 그러나 갈대 상자를 뚫어지게 주목하여 보시는 분이 계셨다. 강에 던져진 갈대 상자를 운전하고 계시며 갈대 상자가 목적을 향해 안전하게 갈 수 있도록 바람의 방향과 속도를 조종하는 분이 계셨다. 그분이 우리가 못 견디게 사랑하는 주님이시다.

 

우리를 주목하여 보시는 분, 갈대 상자는 선장도 없고 키도, 돛대도 없는 이상한 배(?)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 상자 안에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으며 이스라엘의 리더십이 있다. 그리고 섬세하신 그분의 손길이 충만한 상자이다. 그렇다. 세상의 끈이 끊어지면, 하나님이 끈 되어 주신다. 갈대 상자가 어머니의 손을 떠나는 순간에 하나님이 갈대 상자를 장악하시며 개입해 주셨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갈대 상자에 불과하다. 어떻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인지, 말도 안 되는 고난의 끝은 언제인지, 도대체 하나님은 나를 살릴 것인지 죽일 것인지, 이러다가 내 인생이 이렇게 끝나는 것은 아닌지 날마다 불안하고, 날마다 두렵고, 날마다 걱정이 태산이다.

 

그러나 염려하지 말라. 당신이 갈대 상자라면 소망이 있다. 갈대 상자는 보통 상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갈대 상자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이 충만하다. 그 목적이 이끌어 가는 상자가 갈대 상자이다. 이러므로 갈대 상자는 하나님의 목적이 이룰 때까지는 절대로 뒤집히지도 않으며 악어 밥이 되지도 못할 것이다. 다만 죽을 것 같고, 뒤집힐 것 같을 뿐이다. 그것은 느낌이지, 실상은 아니다. 갈대 상자는 하나님이 동행하는 상자이다. 사단이 뒤집지 못하며, 세상이 막을 수도 없을 것이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시며 섭리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가 그 하나님의 섭리에 쓰임 받는 도구들입니다. 모세의 부모나 누이, 바로의 딸 심지어 바로 자신도 하나님의 손에 쓰임 받는 도구입니다. 바로의 핍박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애굽과 분리되게 하였고, 바로의 잔인한 정책은 모세를 왕궁에 초청하여 그로 하여금 가장 뛰어난 지도자로 준비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아무리 똑똑하다고 하여도 모두 다 하나님의 도구에 불과합니다. 문제는 나쁘게 사용되느냐, 아니면 좋게 사용되느냐의 차이입니다. 아무리 인간이 하나님의 나라를 방해하여도 하나님께서는 그것마저도 선을 이루도록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 자신의 교만을 버리고 그 전능하신 하나님 앞으로 두 손 들고 겸손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으로 살려고 할 때에 찾아드는 어려움이나 역경을 원망하지 않고 더욱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을 의지하면서 끝까지 충성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신실하심을 믿고 나아오는 자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늘 신실하심을 보여 주십니다.

 

과거 모세의 가정과 모세에게 하나님의 섭리와 보호하심이 있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 각자 모두에게도 하나님의 섭리와 보호하심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힘들 때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형통할 때나 어려울 때나 바울 사도처럼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고 고백해 드리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모세의 부모가 가졌던 그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우리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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