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동영상

확신하며 드리는 기도 [요일 514-15]

 

14 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엄격하게 말해 요한일서는 513절에서 끝났습니다. 13절에서 요한은 이미 예수님을 믿은 자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기 위해 편지를 쓰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그의 서신을 요약 정리하였습니다. 하지만 다른 서신서 기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추신을 첨부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 이유는 요한이 수신자들의 상태와 행복 그리고 안녕에 대해 지대한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신자들의 고된 삶을 익히 알고 있었던 요한은 그들을 염려했고, 그래서 추신을 덧붙입니다.

 

14~17절에서 그는 우선 기도의 문제를 다룹니다. 기도에 관한 그의 논의는 뚜렷이 구분됩니다. 14~17절은 두 가지 주제를 담고 있는데, 기도의 확신(14, 15)과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16, 17)가 그것입니다. 이어서 나중에 다루게 될 그리스도인이 가질 수 있는 세 가지 최종적 확신들을 열거합니다(18~21). 16절과 17절은 해설이 많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14, 15절을 통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기도의 가르침을 다시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기도의 필요성

 

14a절입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겉으로 생각할 때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기도처럼 자연스럽고 단순한 일이 없다고 여겨집니다. 자녀로서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 아버지께 털어놓는 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실제로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기도로 인해 고민하면서 이렇게 묻곤 합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항상 기도를 들어 주신다는 게 확실합니까? 그분이 응답해 주시리라는 확신을 가져도 될까요? 이러한 질문들이 요한일서 추신의 전반부에서 대답 되고 있습니다.

 

기도에 관한 이 모든 주제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랍니다. 기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이 땅에 계실 때의 주님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누가복음 181절 이하를 보면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아야 될 것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기도하지 않으면 낙망하게 될 것이라는 뜻을 시사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기도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셨습니다. 기도를 위해 "새벽 오히려 미명에" 일어나셨다고 합니다(1:35).

 

기도는 필수적입니다. 따라서 사도가 이를 요한일서의 추론 혹은 결론으로 제시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요한일서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13절을 다시 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13절과 본문을 연결하면 요한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영생이 있는 자들에게 가장 놀라운 일 중 하나는 확신 있는 간구를 올리게 하며 응답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는 이미 321, 22절에서 기도를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21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요한은 본문에서 우리에게 다시 한번 이르기를, 기도 생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으며, 따라서 우리가 기도와 관련한 이 위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확신해야 한다고 합니다.

 

기도란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모든 일들을 알고 계시며 만사가 결정되고 작정 되어 있다면, 기도의 가치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가 하면, 이와 달리 기도에 관해 광신에 사로잡혀 자신의 취향에 맞는 특정한 성경 구절들을 취하며, 특정한 말씀과 그 말씀의 위력에 집착하며 기도에 대한 엉터리 주장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에서 실제로 제시된 바를 그리고 이 주제와 관련하여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주의 깊고도 세밀하게 고찰해야 한다는 것을 첫 번째 원칙으로 삼아야 합니다. 두 번째 원칙은 성경은 결코 스스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기도의 주제와 관련하여 성경이 말하는 모든 내용을 함께 모아 살펴보는 것이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우리는 어떤 한 구절만을 절대적인 교리의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 믿는 교리는 성경의 다른 구절과 상충 되어서는 안 되며, 성경의 다른 분명한 가르침과 모순되어서도 안 됩니다.

 

성경을 통독해 보면 기도하라는 권고들이 자주 나타남을 알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친히 기도하셨습니다. 기도가 습관이셨습니다. 독생자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계십니다. 땅에 계시면서도 여전히 하늘에 있노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10:30)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런데 그런 그분이 왜 기도하셔야 했을까요?

 

제자들을 택하시기 전에 밤새도록 기도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아들이 지상에 계실 때 그토록 많이 기도해야 하셨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지만 그분은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달리 말해서, 성경은 우리에게 기도가 필수적이며 중요하다고, 성경 어디서나 기도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뿐만 아니라, 만일 우리가 긴 교회사를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성도들의 삶에 관한 기록을 읽어 보면 그들이 바로 기도의 사람들이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많은 시간을 기도에 할애하지 않고서도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쓰임 받은 특별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일수록 더욱더 그분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기도 응답을 분명히 보여 주신 사건들을 성경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사실 그것을 설명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목적을 결정하시는 하나님은 수단도 결정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무한하신 지혜를 통해 자신의 종들에게 기도하게 하시고, 그 기도의 응답으로서 특정한 일들을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무한하신 친절과 겸손을 거기서 엿보게 됩니다. 그것은 기도는 우리를 그 사역과 영광으로 이끌어 거기 참여하게 하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 없이도 어떤 일도 하실 수 있지만,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시고 그 기도의 응답으로 일해가십니다.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기도할 필요가 없지 않으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뜻을 이루고자 하실 때의 마지막의 그 결과만 작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취되는 그 과정도 작정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이 기도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도록 작정하신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기도 없이도 하나님의 뜻을 얼마든지 이룰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때 그분의 뜻을 이루고자 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드라마에 동참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놀랍고도 위대한 축복입니다.

 

빌립보서를 읽어 보면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의 '간구'를 통해 자기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리하여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참여하게 되었고, 영광과 즐거움을 바울과 함께 나눌 수가 있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알고 있었으며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손길 안에서 그토록 행복해했던 그 바울은, 그럼에도 자신을 위해 또 자신의 석방을 위해 간구해 줄 것을 빌립보 교인들에게 요청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둘째, 기도 응답의 확신의 근거

 

만일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서 기도하기를 원한다면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 사실이 확실하지 않다면 우리의 기도는 응답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나 자신이 부적당하다면, 혹은 만일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는지에 대해 그리고 그분이 내게 귀 기울이고 계시며, 나를 받아주셨다는 사실에 대해 의심이 든다면,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13절이 중요합니다. 요한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그리고 이를 근거로 기도 응답에 대해 말씀하는 것입니다. "만일 너희가 자신에게 영생이 있음을 안다면,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신다는 사실이다." 만일 내가 내게 영생이 있음을 안다면, 나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만일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안다면, 나는 하나님이 바로 나의 아버지이심을 압니다.

 

하나님은 멀리 하늘에 계시는 어떤 추상적인 미지의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단지 어떤 위대한 힘이신 것만도 아닙니다. 그분은 거룩하고 영원한 곳에 떨어져만 계시는 어떤 위대한 군주도 아니십니다. 만일 내가 내게 영생이 있음과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고 있다면,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시며, 그것도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분이시며 따라서 우리는 그분이 나의 기도를 들으실 줄을 압니다.

 

14절을 다시 봅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여기 "듣는다"라는 말은 기계적인 그 무엇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인격적인 하나님이시기에 들으십니다. "듣는다"라는 매우 특별한 단어이며, 거기에는 큰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귀가 우리를 향해 열려 있다는 뜻입니다. 또한, 그분의 마음이 우리를 향해 넓혀져 있음을 의미합니다. 만일 우리에게 영생이 있다면, 우리는 그분의 자녀이며,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 간구를 들으실 준비를 하고 계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 치유 받은 맹인도 이 점을 분명히 표현한 바 있습니다. 그가 주님으로부터 치유를 받은 후에, 유대인들은 그 치유자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그 유대인들은 마치 그런 일이 일어날 수는 없다고 입증하려는 듯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우리는 그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맹인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9:31).

 

그의 말은 이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이 분을 보내신 줄 알고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고침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죄인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죄인은 듣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가 한 말은, 하나님은 죄인들의 간구를 들어 주지 않으며, 하나님의 귀가 그들을 향해서는 열려 있지 않으며, 또한 그의 마음이 그들을 향하여 넓혀져 있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요한일서 서신의 모든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자신에게 영생이 있음을 안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준비를 항상 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를 받아들일 준비를 항상 하고 계십니다. 그 점에 대해 전혀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시며, 영원하신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머리털까지 다 헤아린 바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되 경외하는 마음과 경건한 두려움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늘에 계신 그분은 바로 우리의 아버지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019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러므로 결단코 불확실한 마음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간구를 드리기 전에,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셨다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오는 것을 기뻐하시고 우리가 올리는 기도와 간구 듣기를 좋아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감사드림으로 간구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에게 분명하게 영생이 있다면, 우리는 이미 우리 왕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총애를 받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자신이 받아들여진 바 되었음을 알아야 할 뿐 아니라, 우리 기도가 응답 되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15절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이것은 정말 중요한 원칙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졌음을 확신할 수 있기 전에 지켜야 할 조건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기도 동기가 올바르고 진실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2b절과 3절은 말씀합니다. "2b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우리 기도는 이기적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 축복을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만을 위해 그렇게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사역에 복을 달라고 간구하지만, 결국 자기 자신의 탐욕과 자존심을 위해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그들은 자신의 기도가 응답 되지 않았다고 하여 놀라서는 안 됩니다. 또 어떤 목사는 자신이 설교한 결과 영혼을 얻을 수 있기를 간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영혼들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만일 영혼들을 얻는다면 그가 더욱 교만에 사로잡힐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자신의 기도가 응답 되기를 바랍니까? 그렇게 특별한 간구를 드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순전히 이기적인 그 무엇, 자신의 탐욕과 자기 사랑을 위해 다 써 버릴 그 무엇이 아닙니까? 동기가 올바르고 깨끗하며 또한 순수해야 합니다.

 

두 번째 조건은 믿음입니다. 주님이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122절입니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야고보의 말에 귀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15~8절입니다. "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야고보는 믿음 없이는 우리의 기도가 응답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기도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 어떠한지 살펴봅시다. 우리는 진정으로 인격적이신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아니면 기도하면서도 응답을 의심하면서 한 번 기도나 해보자는 생각입니까? 그렇다면, 기도가 응답 되지 않는다고 해도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에 관해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관계에 관해 우리는 아무런 의심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 기도는 믿음과 신앙에 기초한 것이어야 합니다.

 

세 번째 조건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이 여기 있습니다. 요한복음 157절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한이 본서 321, 22절에서 언급한 말을 기억하십니까? "21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우리는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하고, 하나님과 그분의 거룩한 율법에 순종해야 합니다. 의도적으로 죄를 지으며 살거나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고 아는 어떤 것을 행하고 있다면, 기도 응답을 기대할 권리가 없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생각대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소원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신학자 도드는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올바로 고찰해볼 때, 기도란 우리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전능하신 분의 힘을 빌어 오는 수단이 아니라, 우리의 소원이 하나님의 마음에 따라 재조정되고 그의 뜻을 성취하는 통로가 되도록 만드는 수단입니다." 그래서 바클레이는 기도를 가리켜 "하나님께 이야기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마지막 조건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14절입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1516절입니다.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1623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려지지 않는 기도는 아무 가치도 없습니다. 이것은 절대적이고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이 이름, 주님의 공로 외에는 기도 응답을 기대할 권리가 없습니다.

 

셋째, 기도 응답의 확신

 

우리는 자신이 받아들여졌음을 알아야 할 뿐 아니라, 기도 응답을 위한 조건들을 지킬 때 우리가 간구한 바를 얻는다는 것도 믿어야 합니다. 15절을 다시 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요한은 "우리가 얻을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그것들을 얻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미 그것들을 얻었으며, 이미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는 매우 주목할 만하며 놀라운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기도하는 자들은 자신이 하나님께 간구한 것들을 이미 얻었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124절의 유명한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모르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실은 우리는 우리에게 정말 있어야 할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826, 2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는 연약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구하고 또 구하면 성령 하나님께서 기도를 바꿔주시기도 하고, 바로 구해야 할 것을 구하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정말 있어야 할 것을 깨닫는 과정이 바로 기도입니다. 내가 구하고 받는 과정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채워주셨다는 것을 모르고 자기가 잘 나서 얻었다고 생각하는 인생을 삽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모든 것을 다 아신다고 말씀하시는 동시에 구하고, 찾고 부르짖으라고 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한 소녀가 선교사님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 소녀가 편지 쓰는 모습을 보고 부모가 권면했습니다. "애야, 선교사님이 너무 바쁘시니까 답장을 요구하지는 마라."그 소녀가 편지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우리는 선교사님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선교사님의 어떤 대답도 기대하고 있지 않습니다. 답장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이 편지의 내용과 같은 태도를 하나님께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답장은 필요 없다는 태도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77절에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기도응답은 여러 모습으로 주어집니다. 어떤 기도는 즉시로 기도한 대로 응답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떤 기도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이것도 응답입니다. C. S. 루이스의 영적 멘토였던 조지 맥도날드는 말했습니다. "아주 미미하고 세세한 것에 귀를 기울여주시는 신이 아니라면 믿을 수 없는 신이다. 그러나 반면에 인간의 요구를 하나도 물리치지 않고 듣는 족족 다 받아주는 신이라면 그것은 악한 신임이 분명하다." 우리가 욕심으로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진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어떤 사람은 심장마비에 걸렸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사이비 교주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욕심대로 하나님이 응답하신다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자녀가 원하는 대로 해주다 결국 인생을 망가뜨리는 결과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욕심에 절대 응답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419절에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새번역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나의 하나님께서 자기의 풍성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광으로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을 모두 채워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필요를 채워주신다'라는 고백을 '나의 욕심을 채우시리라'라고 바꿔서 읽고 싶어 합니다. 욕심과 필요를 구별할 줄 아는 마음이 없다면 절대로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합니다.

 

그리고 다른 방법으로 이뤄주시기도 하십니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세 번씩이나 간구했지만, 하나님은 바울의 질병을 고쳐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은 기도가 응답 되지 않은 것에 대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28~9절을 새번역으로 읽어 봅니다. "8 나는 이것을 내게서 떠나게 해 달라고, 주님께 세 번이나 간청하였습니다. 9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은 것을 또 다른 응답으로 해석했습니다.

 

크리스웰 목사는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나는 힘을 달라고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약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승리할 때 교만해지지 않도록 눈물도 함께 보내셨습니다. 나는 빛을 달라고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나에게 믿음을 주셨습니다. 나는 성취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간구하였는데, 하나님은 내가 순종하도록 약하게 만드셨습니다. 나는 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도록 건강을 달라고 간구했는데, 하나님은 더 나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셨습니다. 나는 행복해질 수 있도록 부유함을 간구하였는데, 하나님은 내가 지혜로워질 수 있도록 가난을 주셨습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칭찬받을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간구하였는데, 하나님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약함을 주셨습니다. 나는 인생을 즐길 수 있는 모든 것을 달라고 간구하였는데, 하나님은 모든 것을 즐길 수 있는 생명을 주셨습니다. 나는 내가 간구한 것은 아무것도 응답받지 못했지만 내가 소망했던 모든 것들에 대해 나의 기도는 응답받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기도는 기다리라는 응답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그냥 기다리라는 것이 아니라 기대하며 소망 중에 기다리는 것입니다. 청교도였던 토마스 왓슨은 하나님이 왜 기도 응답을 지체하시는지를 네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하는 소리를 더 듣고 싶어 하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우리를 더 겸손하게 하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넷째, 기도 응답이 이뤄질 때 기쁨이 더 충만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보나롤라는 "하나님의 지체를 하나님의 거부라고 생각하지 말라"라고 말했습니다. 기도 응답이 지연되면 이 말씀을 떠올리시기 바랍니다.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능력을 따라 우리가 구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보다 훨씬 더 넘치도록 하실 수 있는 분에게"(3:20). 하나님이 우리가 구한 것보다, 훨씬 더 넘치도록 역사하시기 위해서 우리로 기다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할 바로 그 시간에 응답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영생이 있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간구할 때 반드시 응답하실 것입니다. 이런 기도 응답을 체험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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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2014.04.06 (요 17장 1-5) 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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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2014.03.23 (창 20장 1-7) 680
122 2014.03.16 (엡 4장 32) 653
121 2014.03.09 (엡 4장 1-6) 686
120 2014.03.02 (롬 15장 1-7) 624
119 2014.02.23 (갈 6장 1-5) 672
118 2014.02.09 (눅 12장 24-32) 798
117 2014.02.02 (요일 1장 1-4) 726
116 2014.01.26 (느 8장 13-9장 6) 822
115 2014.01.19 (느 8장 1-12) 771
114 2014.01.12 (막 9장 14-29) 859
113 2014.01.05 (사 58장 6-12) 825
112 2013.12.29 (출 4장 1-4) 832